[민의련칼럼12] 병원을 떠난 친구에게

2000년 6월 23일

회원 최용준

친구야, 
1991년 여름 초엽, 우리는 거리에 함께 있었지.
강경대를 살려내라! 박창수를 살려내라! 김귀정을 살려내라! 그리고 또 무고하
게 죽어간 모든 민주열사를 살려내라! 살려내라!
그 때 나는 철이 든 이후 처음으로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나는 그 때의 
울분과 외침이 아직도 생생한데 친구야 너도 그렇지 않니?
그 후로 몇 년이 흐르고 너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임상의사가 되었고, 나는 
기초교실에서 제도와 정책을 공부하게 되었지. 
너는 내가 보기에도 매우 훌륭한 임상의사야. 인턴 때 곧잘 환자에게 짜증을 
내던 나와는 달리 너는 환자에게 항상 친절하고 최선을 다하는 의사였어. 나
는 “그래 너 같은 사람이 환자를 보는 임상의사가 되어야지”라고 늘상 생각
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친구야, 
너는 지금 하루하루 생명이 사그라드는 환자를 뒤로 한 채 병원을 떠나 있고, 
나는 임상의사들이 자리를 비운 병원을 옆에서 바라만 보고 있구나. 나는 환자
를 돌 볼 임상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한스러울 때가 없었다. 

지금은 제목도, 저자도, 정확한 문구도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내가 대학신입
생 때 읽었던 책에 이런 말이 써 있었다. 
“세상의 모든 걸인이 사라지고 단 한 사람의 걸인만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런 사실에 도덕적으로 괴로워하며 살고 싶다” 
역사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우리가 이 세상의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것은 바
로 이 같은 도덕적 울림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 나중에 내가 공부했
던 사회과학들은 이런 세상을 바라보는 이성과 논리를 갖추게 해주었지만 나
로 하여금 운동을 시작하게 하고, 지금까지도 그 길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
는 근본은 바로 대학신입생 때 읽었던 한 줄의 문구였어. 

불꽃같던 20대, 우리들의 철학적 가치였던 맑스주의는 실천적인 휴머니즘을 위
해 이론적으로 반휴머니즘(Anti-humanism)을 채택했지. 이론적으로 반휴머니즘
을 채택한 것은 인간 개개인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가볍게 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개개인의 존재 의의와 가치
를 더욱 실천적으로 규명하고, 모순을 바꾸어내기 위함이었지. 민중들의 고통
스러운 삶은 자본가 개개인의 탐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구조적 모
순의 결과라는 해석은 민중과 자본가 개개인이 얼굴을 맞대고 대립하는 것이 
운동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어. 

굳이 맑스의 해석틀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구조와 제도의 모순
을 지적하고 있지. 다 좋은 말들이야. 그런데 친구야, 맑스의 이론적 반휴머니
즘은 실천적 휴머니즘과 대립되지 않는 것이었어. 만약 이론적 반휴머니즘이 
실천적 휴머니즘에 기초하고, 이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맑스주의를 결
코 나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야. 

친구야, 우리가 구조와 제도를 왜 주목하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다시 생각해보
지 않겠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의사들의 파업이 실천적으로 민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너도 잘 알지 않니? 이론적으로 지극히 휴머니즘적이라 
할지라도 그 실천적 영향이 반휴머니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겠니?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병든 민중과 의사들이 얼
굴을 맞대고 대립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니? 

나는 지금 의약분업에 대한 주장들의 잘잘못을 가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런데 친구야, 지금 자신을 돌 볼 사람을 찾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이 
우리가 추상적으로 이야기했던 민중의 구체적 실체야. 90년대 우리의 권리, 우
리가 속한 집단의 권리에 연연하지 않고 민중의 작은 권리를 되찾기 위해 너
와 내가 함께 뛰어다니지 않았니? 너와 나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빚진 사람들
이야. 부모를 잘 만나서, 그리고 남들보다 머리가 좀 더 좋아서, 혹은 운이 좋
아서 너와 나는 지금 의사가 되어 있지. 그런데 친구야, 지금 너는 이유야 어
찌되었든 병든 민중의 치료받을 기본적인 권리를 가로막고 있어.   

사회 부조리에 분통을 터뜨리던 대학시절,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어. 나도 
많이 변했고, 너도 많이 변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믿어. 단 한 사
람의 걸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책임으로 통감하는,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살려내라며 거리에서 함께 울음을 터뜨렸던 그런 너를 나는 믿어.  

나 같으면 2～3분이면 끝날 것을 새벽에 응급실을 찾아온 환자의 손을 꼭 붙잡
은 채 30～40분씩 환자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 친구야 빨리 너의 그런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지금 이 시간에도 병
든 민중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어. 
친구야 병원으로 빨리 돌아와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