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의련칼럼20] "적정부담-적정급여-적정수가"모델이 갖는 함정 

회원 강동진 

박토(薄土) 속에 묻혀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그 동안 가려져 있던 숱
한 부조리들이 세상에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되었다. 흔히 '의료대
란'이라 불리는 금번 사태 초기에는 문제의 본질이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사태 전개과정에서 문제의 본질은 전연 다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즉 의사집단의 보수성과 경제적 이해
에 대한 집착이 금번 사태의 발단이 되기는 했지만, 그 근간에는 의료계와 국
민,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의료보험제도의 모순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의료보험제도가 문제였다"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문제의 긍정적 해결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현 상황의 복잡성
이 있다. 예컨대 의료계는 의료보험제도가 문제였다는 인식을 하면서도 역설적
으로 모순의 유지와 강화를 의미하는 과거로 회귀하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
다. 젊은 의사들을 중심으로 국민과 함께 하는 의료개혁을 주창하고는 있지
만, 의료계의 주류는 젊은 의사들의 주장을 냉소적으로 혹은 적대적으로 바라
보고 있다. 정부는 건강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개별 가계와 개인으로 전가시키
는 방향으로 의료보험제도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최근 정부 내에서 부쩍 힘
을 얻고 있는 민간의료보험 도입 논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의사파업 철회와 
의약분업의 성공적 정착에 열심이었던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적정한 의료 혜택
을 보장하면 국민들이 부담을 더 할 수도 있고, 수가인상을 통해 의사들의 적
정 수입도 보장할 수 있다는 "적정급여-적정부담-적정수가"를 의료보험제도의 
개편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시민단체가 제시하고 있는 적정 모형은 일견 그
럴 듯할 뿐 아니라 안정적 소득 구조의 확보라는 의료계의 이해와도 일치하기 
때문에 종국에는 의료계 주류의 동의 혹은 묵인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진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이 제시하는 적정 모형이 민중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
가갈 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적정 모형은 그 이용자가 
비용 부담을 더 하면, 혜택을 더 받을 수 있다는 논리적 정합성에도 불구하
고, 민중적 동의에 기반한 의료보험제도의 전면적 개편을 이끌어 내기에는 결
정적인 맹점을 가지고 있다. "적정"의 수준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라는 식
의 문제제기는 오히려 적정 모형이 가진 본질적 문제점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
들기 때문에 적절한 비판이 되기 힘들다. 적정 모형의 본질적 맹점은 "적정부
담이라는 개념이 지금까지 민중들이 적정한 부담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믿음
을 전제로 도출되었다"는 것에 있다. 즉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민중들의 적정
치 못한 부담"으로 설정하면서, 민중건강에 대한 정부의 무책임성과 신자유주
의적 개편 음모, 이윤추구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의료체계의 실상은 은폐되
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진다. 의료계 폐·파업과 잇따른 수가 인상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 증대로 고충을 겪고 있던 민중들은 이제 "알고 보니 문제의 
근원은 당신들이 돈을 덜 내서 그렇습니다. 당신들이 돈을 더 내면 이 문제는 
해결됩니다"라는 실로 황당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민중들이 부담을 적게 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은 의
료보험료 수준을 들고 있는데, 이는 통계치를 작위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보
험료 수준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민중들이 의
료이용을 위해 과외로 지출하는 비용은 공적 의료보험료의 세 배에 이른다. 올
해 민중들이 의료보험료로 지출하는 비용은 약 4조8천억이지만, 의료이용을 
할 때, 환자가 직접 부담하는 본인부담금의 규모는 약 9조1천억원에 이르는 것
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공적 의료보험만으로는 자신의 건강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각종 건강 관련 사보험에 가입하면서 지출하는 비용은 작년 한 해 동
안 무려 5조원에 이르고 있다. 이런 실물경제의 경험을 가진 민중들은 지금까
지 당신들이 돈을 덜 냈기 때문에 우리나라 의료가 이 모양이라는 이야기를 납
득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의 보장성이 너무나 취약하기 때문에 민중의 건강을 의
학적으로, 경제적으로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중병에 걸
린 사람이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거나 불우이웃 돕기 프로그램
에서 남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의료보험제도를 가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진풍경이다. 민중들은 돈은 돈대로 쓰면서 정작 필요할 
때는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자신의 건강문제가 좌우되고 있는, 개인에게 
모든 문제가 떠넘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료
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해야 하는데, 이는 보험재정의 대폭적인 확충을 필요로 
한다. 결국 핵심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사회진보연대 정
책위원장인 김성구 교수(한신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
다. "더 이상 보험재정이 역진적 성격의 개인 부담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보
험재정을 통해 소득재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사
용자)의 보험료 부담 증대 및 국가재정을 통한 의료보험재정의 지원 증대, 그
리고 누진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세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고 의료보험
료 부담에서도 고소득층의 부담률을 인상하고, 저소득층의 부담률은 경감 혹
은 면제시켜주어야 한다." 바로 이런 것이 보험재정을 연대적인 방식으로 확충
하는 방안이며, 다수 민중을 위한 의료보험제도를 만들기 위한 핵심적인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작금의 의료대란에 직면해서 이 같은 요구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공익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시민단체는 민중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부와 자본이 더 많은 부담을 해야 
한다는 민중적 요구의 분출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노동, 농
민단체들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의료보험료 납부 거부 투쟁은 중요한 의미
를 가지고 있다. 실제적인 성사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이는 근본적 모순을 은
폐한 채 이루어지고 있는 민중만의 부담 증대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이기 때
문이다.  

민중건강권은 정부나 시민단체 혹은 그 누군가의 시혜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
라 민중들이 자신의 권리로 쟁취하는 것이다. 즉 민중건강권은 민중이 자신의 
건강을 얼마나 온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가? 라는 보장의 내용과 함께 건강보
장의 내용이 만들어진 과정과 의사결정 및 운영구조에 대한 민중의 참여라는 
형식이 충족되어야 한다. 민중적 요구의 분출을 잘 짜여진 틀이나 제도 속에 
가두는 것은 민중을 민중건강권 쟁취 투쟁의 주체가 아닌 수동적 관망자로 남
게 하는 것이다. 민중적 요구와 행동의 분출은 민중건강권 쟁취 투쟁의 방향으
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지, 미리 짜여진 틀로 제도화시켜야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숱한 부조리들이 다 쏟아져 나온 마당에 희망만을 남겨둔 채 판도라 상자
의 뚜껑이 닫혀버리는 암울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상자
의 뚜껑이 닫히기 전에 민중의 요구가 민중의 생생한 목소리로 주장되기를 희
망한다. 판도라 상자의 뚜껑이 닫히기 전에.....

* 본 칼럼은 민중의료연합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