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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글번호 2777번 등록 2004-07-01 21:03:13
글쓴이 범국민위 글쓴곳
제목 [안내]7월 봉행될 민간인 피학살 추모위령제 안내


안녕하세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입니다. 
7월 봉행될 민간인 피학살자 추모 위령제 안내합니다. 


1. 대전산내학살 위령제 

제 5회 대전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가 7월 4일 오전 10시부터 '조속한 입법과 
철저한 진상규명'을 모토로 산내학살지에서 진행됩니다. 

<<행사개요>> 

- 일  시 : 2004. 7. 4일(일) 오전 10시˜12시 
- 장  소 : 대전역광장(장소 변경됨)
- 주  최 : 대전산내학살 대책회의 희생자 위령제 준비위원회 
- 주  관 : 제주4.3유가족/여순사건유가족모임/대전형무소희생자 유가족 
             대전산내학살 대책회의/대전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대전충남본부 
- 후  원 :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대전광역시청 
             대전광역시의회, 동구청, 동구의회, 민족놀이패 우금치 
- 식   순  
0 개회선언 
0 산내학살 희생자 영령 묵념 
0 진행경과보고 
0 추 념 사 / 박병호 동구청장, 김원웅 국회의원 
0 추    도 / 유족대표 
0 위령 공연 및 헌화(민족예술단 '우금치') 

<<대전 산내학살이란?>>  
1950년 7월, 대전형무소에는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 정치범들로포화상태
였다. 정원이 1200명이었으나 3배가 넘는 3-4000명이 수감되어 있었던 것으로 
당시 간수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수형인들의 대부분은 제주4.3사건과 여순
사건 관련자, 전쟁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이었다.   

1950년 7월 6, 7일 양일에 걸쳐 명적계를 보고 분류된 수형인 중 사상범들은 
8-10일 사흘에 걸쳐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로 끌려가 미군과 사회 유지들이 지
켜보는 가운데 전원 학살당하였다.   

그러나 학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형무소 관계자들이 3일간 수형인들을 끌
고나갔다고 증언하는 것과 달리 현장 총살집행자 등 관련자들은 학살이 총 10
일간 진행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주변에 살던 주민들도 열흘간 학살이 
진행되었다는 동일한 증언을 하고 있다. 이는 수형인 학살 이후, 대전 지역의 
보도연맹원과 좌익 관련 활동 전력이 있는 이들을 예비검속하여 모두 학살하였
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즉 형무소 사상범 외에도 군경이 후퇴를 시작한 7월 14
일~16일 막판까지 골령골에서는 학살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된 수는 해제된 미군문서에서는 여순사건 관련자 1200명, 
제주4.3사건 관련자 300명 등 총 1800명이라고 하고 있으나 3000명 이상이 학
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앨런 위닝턴 등 외신기사는 7000-8000명이 학살된 것을 
보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2. 경산 코발트 학살 위령제 

7월 4일 경산코발트 학살 현장에서 제5회 경산코발트 학살 위령제 봉행합니
다. 이번회에는 6개 종단에서 합동으로 추모제를 올려주시기로 하였습니다. 많
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일시 : 2004년 7월 4일 일요일 오후 2시 
- 장소 : 경산 코발트 학살 현장 
- 문의 : 이태준 경산유족회 회장 (018-516-7007) 

<<경산 코발트 학살이란?>>  
1950년 7-8월에 경북 경산의 코발트폐광에서는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다. 경산
시 평산동 산42-1번지 일대 폐광산 수직갱도와 인근골짜기에서 대구형무소 재
소자와 경산, 청도 지역의 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당했다. 
당시 목격자들은 하루에 열 대 정도의 트럭에 사람들이 실려왔으며 이런 상황
이 열흘간 진행되었다고 한다. 또 경산경찰서에 근무했던 이가 임종 직전에 경
산 코발트에서 3500명이 죽었다는 증언을 자식들에게 남긴 점도 3500명 학살
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당시 대구형무소 수형인들은 포승줄에 묶여 군용트
럭에 실려왔으며 수직갱도 입구에 세워져 총살되어가 산 채로 수장되기도 했
다. 또 예리한 흉기로 가격당하거나 기름에 태워져 학살당하기도 했다. 예비검
속된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서에서 인근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다시 코발트 광산
으로 끌려와 학살당했다. 이들에 대한 학살 방법도 앞서 기술한 것과 같이 잔
학무도한 것이었다.   


3. 익산역 미폭 사건 위령제 

- 일시 : 2004년 7월 11일 오후 2시 
- 장소 : 익산역 광장 
- 문의 : 이창근 회장님 011-672-6496 

<<익산역 미폭 사건이란?>>  
1950년 7월 11일 당시 기관차사무소에서 전시 비상 상황에 대한 교양교육을 받
고 휴식을 하고있던 기관사들은 비행기에 성조기가 그려진 것을 확인한 후 태
극기를 흔들며 아군임을 알렸다. 하지만, 미군기(B29 전폭기) 2대가 이리역(현
재 익산역) 기관차사무소, 송학동 민가, 평화동 호남선철길과 변전소(현 터미
널 뒤) 사이에 약 10분 동안 수백 발의 폭격을가했다. 당시 이리 시민들은 전
쟁이 터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며 피난 가는 사
람 하나 없이 평화롭게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폭격 당일 이리시내에는 우시
장이 열려 김제, 황등, 전주, 군산등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
었고 소집영장을 받은 이들이 군입대를 위해 이리역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
날 폭격으로 인하여 이리역 구내에서만 84명이 사망(이리역 근무자 54명 이상
이 몰살)하였고, 송학동 가옥 50채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
으며, 가옥 폭격시 사망한 사람과 변전소 부근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까지 합하
면 그 수는 3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또 7월 15일에도 평화동 변전소와 철길 
주변과 마을은 미공군기의 기관총탄 세례를 받았다.   


4. 충북 영동 노근리학살 위령제 

- 일시 :  2004년 7월 26일 10시 30분 
- 장소 : 노근리 쌍굴다리 학살현장 
- 문의 : 정구도 대변인 019-643-3192 

<<노근리학살이란?>>  
노근리 학살은 7월 26일부터 7월 29일까지 3일간 진행되어 노인과 어린이를 비
롯해서 400여명이 학살되었다. 노근리사건은 1999년 9월 미국의 2건의 비밀 문
서와 당시 학살에 참가했던 군인의 증언을 토대로 AP통신에 의해 공개된 후 전
세계에 알려졌다. 지난 1950년 미군은 당시 피난을 가던 이들을 안전한 곳으
로 대피를 시켜주겠다며 끌고 가다가 무전기로 군용기를 호출해서 무참히 폭격
을 가해 죽이고 주민들을 굴다리 안에 몰아넣고는 기관총 사격을 가해 학살한 
것이다.   

당시 학살 만행에 직접 참가했던 미군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은 당시 노
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중위였던 퇴역 대령 로버트 앤 캐롤은 제7기갑 연대 소총수들이 근처의 
진지들로부터 민간인을 사살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이 사건은 우리가 민간인이
건, 군인이건 그 누구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에 있은 일이다. 
한 사람도 전선을 넘어 오지 못하게 하라. 전선을 넘어 오려 하는 사람들은 누
구든지 사격하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한편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당시 3일간의 끔찍했던 
상황을 알 수 있다. 당시 열 여섯 살이었던 정구식씨는 AP 통신 기자에게 '미
군 비행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폭탄을 떨어트린 후 기총사격을 해 많은 사람들
이 현장에서 죽었다. 그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떨어졌는데 나중에 보니 어린이
의 목이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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