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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당시에 학살이 그렇게 광범위하게 진행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냉전체제 형성기에 발생한 정치적 학살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1945
년 해방을 맞은 한반도에서는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이
합집산을 거듭했습니다. 당시 남한 인구의 70% 이상은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체
제를 선호하는 경향이었으나, 1948년 남한 단독정부(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좌
익활동은 사실상 불법행위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북한에서는 엄격한 토지개혁
을 단행하여 국민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았던 데 반해서, 남한에서는 친일파들
이 재산과 공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친일파 청산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불신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이는 단독정
부 수립에 반대하는 다양한 투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정부수립
직후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으로 정치활동을 묶고 국민
보도연맹을 결성하여 좌익 전력자들을 회유,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여
기에 적극 찬동하지 않는 수많은 민중들을 불법학살하면서 권력을 강화해갔습
니다.
그런 배경하에
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1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정치적 희생
양이 되었고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정치범을 포함한 형무소 재소자들과 국민보
도연맹원에 대한 일제 검거와 학살이 자행됐던 것입니다. 보도연맹원 등에 대
한 학살은 이후 좌우 양쪽에서 부역자 처벌을 명목으로 한 보복학살의 연쇄고
리를 형성하여 학살의 규모는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또한 공비 토벌이나 부역
자 색출 명분으로 초토화 작전이 구사되는 등, 국가권력이 학살에 앞장서고 이
를 정당화하는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성격이 짙었습니다. 또한 미군이 한국전
에 본격 개입한 이후에는 무차별 폭격 및 기총소사에 의한 대량학살이 자행되
었는데 당시 미군은 피난민에 대한 폭격도 서슴지 않는 등 '흰 옷 입은 자'를
모두 사실상 적으로 간주하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남한에서만 약
10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는 참극이 일어났던 것입니
다.

13.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요?

전쟁 발발 전에
이미 1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주 4.3사건으로 약 3
만 명, 여순사건으로 전남 동부 일원에서 약 1만 명이 학살되었고, 이후 전개
된 빨치산 토벌 작전으로 지리산, 백운산을 비롯한 소백산맥 일대의 많은 주민
들이 학살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1946년 대구 10.1사건 당시에도 대구 경북
의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같은 해 화순탄광 노동자들을 미군 헌병이 학살
한 사건, 울릉도와 독도 해역에서 조업중인 어부에 대한 미군 폭격 등 크고 작
은 피해가 많았습니다. 나아가 광란의 살육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도 이후 강
제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부분 학살당하고 맙니
다.
14. 국가보안법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었다니 놀랍습니다
일제시대의 치안
유지법을 모태로 하여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안보에 악용
돼온 법입니다. 하지만 그 태생을 살펴보면 악용되었다기보다는 본연의 임무
에 충실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은 통일
된 민족국가를 염원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기대를 저버린 반역사적, 반민족적
행위였습니다.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그밖의 많은 단선단정 반대
투쟁은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정권안보를 위해 서둘러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1948년 12월 1일) 국민
보도연맹을 결성하기에(1949년 6월 5일) 이릅니다. 즉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
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했고 이후 군사독재권력이 반공을 빌미로 민주인
사 탄압에 이 법을 남용하면서 국보법의 폐해는 더욱 커져갔던 것입니
다.
15. 해방이 되었는데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를 학살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
지 않습니다.
남한에서 민간인학살은 해방과 국가건설 과정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해방 후 3년간 빼앗긴 대지의 척박함을 딛고 이 땅에 자유롭고 평
등한 국민주권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열의는 매우 높았으나 해방과
함께 진주한 외세에 의해 사회는 또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미군정
은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친일 관료들을 대부분 재등용했고 친일파 척결에 앞
장섰던 반민특위는 오히려 해체되는 등, 친일파들은 대부분 일제강점하의 지위
와 재산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이런 가운데 지방
마다 지역 유지로 행세하던 친일파들이 여전히 권세를 누리면서 타지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들과 대립하게 됩니다. 미군정에 빌붙
어 예전의 지위를 계속 누리던 친일파들은 전쟁이 발발하자 좌익계는 물론 민
족주의자나 우익계 독립운동가들까지 '빨갱이'로 몰며 학살합니다. 더욱 기가
차는 것은 이렇게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또 군사독재정권의 앞잡이로 기회주의
의 전형을 보여준 '꺼삐딴 리'들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기득권층
을 형성하고 민간인학살 사건 등 자신들의 죄과를 은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는 점입니다.
16. 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입
니다
해방 후 이 땅의
민중들이 원한 것은 통일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
권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고 미군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면서 민중의 신뢰
를 잃어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정치세력이 정권을 규탄하기에 이르렀
고, 이승만 정권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협조적인 친일파와 친미
파에 기댄 채 민중의 요구를 묵살하면서 정치적 반대세력과 무고한 민중들을
학살, 제거하게 됩니다. 정권은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
르면서 이러한 대학살을 정당화합니다. 결국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은 권
력 장악과 유지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반공이데올로기의 결합을 배경으로 하
여 일어난 것이었고, 이렇게 뿌리내린 반공체제는 이후 50년간 대한민국을 지
배하는 중심축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17.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은 이런 사실을 몰랐나요?


롤링스 에머리치
(Rollings S. Emmerich) 중령은 <1950년 한국전쟁 초기의 역사>란 문서
에서 1950년 7월 1일 부산, 대구형무소 수형인 8천여 명을 처형키로 결정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미군 제25 CIC 분견대는 1950년 11월 2일자 활동보고
서에서 "1950년 7월 1일 한국정부의 지시로 대전과 인근의 민간인 1400여 명
을 학살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문서를 통해 확인된 내용은 형무소 수감
자 학살을 이승만 정권의 최측근인 국군 제3사단 23연대장 김종원이 1950년 7
월 1일에 이미 기획 집행했고, 실행 이전에 미군정과 사전협의하여 승인을 받
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2004년 7월 부산일보가 발굴, 특종 보도한 미국측 문서
를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18. 학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건가요?
학살의 일차적 책
임은 대한민국 정부에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했고 국민
의 군대와 경찰이 오히려 국민을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방 후 3년간
의 미군정 기간과 이후 미군사고문단의 개입, 그리고 1950년 7월 초 작전지휘
권이 미군에 넘어간 상황 등을 감안할 때 노근리 사건 등 미군의 직접 학살은
물론 이 기간에 자행된 모든 학살사건에 대해서도 미국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
습니다. 민간인 학살은 제네바협약에 반하는 전쟁범죄이며 국제법상으로도 공
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합니다.
19. 이러한 학살 사실이 당시에도 알려졌나요?
당시의 학살은 너
무나 보편적이어서 학살당한 이의 가족이나 친지, 이웃은 물론 이런 소식을 전
해 들은 모든 국민들에게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외신에서
이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는데요.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공비토벌을 목적으
로 1950년 2월 1천여 명의 주민을 학살한 거창, 산청, 함양사건을 예로 들자
면, 거창 출신 신중목 의원이 임시수도가 있던 부산의 국회에서 이를 폭로하
여 우여곡절 끝에 결국 책임자가 군사법정에 회부되었는데, 당시 이 사건을 접
한 세계는 경악했습니다. 영국의 한 신문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
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악평을 하기도 했습
니다. 또한 영국의 종군기자인 앨런 위닝턴은 대전형무소 산내학살을 직접 목
격하고서 <I saw the Truth in Korea(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라
는 소책자를 펴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와
<주간조일> 등은 부산 수장 사건을 기사로 다루면서! "철사로 엮인 시체
더미가 어장의 그물에 걸려와 어업을 못하겠다고 항의하는 어부들"에 관해 보
도하기도 했습니다.
20. 전쟁범죄라면 종전 후 재판을 통해 문제가 해결됐어야 하는 것 아닌
가요?

민간인학살은 분
명히 전쟁범죄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경우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전투가
종료되었고 이후 전쟁범죄에 대한 후속조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더
군다나 한국전쟁은 내전과 국제전의 성격을 모두 띠고 있는데, 이후 세계가 냉
전체제로 급속히 재편되고 이데올로기 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한반도가 대치
의 극단에 서게 되면서 전쟁범죄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
습니다. 또한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어서 공과나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사후처
리를 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민간인학살 등 전쟁범죄의 해결은 사실상 책
임주체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가 의지를 갖고 문제해결에 나서야 하며 또 우리 국민들의 의지가 모아져야만
합니다.
21. 그렇게 학살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있는지요?
지난 1960년
4.19 직후에 활동한 전국유족회는 자체 조사를 통해 피학살자의 수가 약 114
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당시의 유족회 자료를 5.16쿠데타 세력이 모
두 수거해가 그 근거를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이후 민간에서 실태조사 및 자
료추적을 통해 추산한 피학살자의 수는 약 100만에 이릅니다. 이 중 미군, 국
군,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 등의 비정규무장대에 의한 학살이 대다수를 차지하
며 인민군에 의한 피해도 일부 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국민보도연맹원, 좌
익경력자 및 그 가족,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 형무소 재소자, 빨치산 활동지
역 인근 마을 주민, 피난민 등, 사실상 국민 모두였습니다. 구체적인 사건들
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그 중 세간에 어느 정도 알려
진 일부 사건을 시기, 지역, 유형별로 하나씩 선별하여 설명하겠습니다.
(3편에서 계속)

1편 : 이땅에서 해원하지 못한 억울한 죽음들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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