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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 불안정한 해방정국에서
학살은 이미 시작되었다.

22. 해방군인가? 점령군인
가? 노동자 대학살 (화순탄광 노동자 학살)
1946년 8월 15일 광주 8.15 기념식
에 참석하려던 3천 화순탄광 노동자들을 미군 제40사단이 토끼몰이 하듯 쫓는
과정에서 김판석 씨 등 여러 명이 미군 총에 맞아 사망 또는 실종되고 수백 명
이 부상당했습니다. 공장 자주관리를 추구하던 당시 전국노동조합평의회에 대
한 미군의 와해 작전의 일환으로, 해방 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자행한
최초의 민간인학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 후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
군'이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23. 전선이 형성된 적이 없는 독도에도 폭격은 쏟아지고 (울릉도, 독
도 폭격)
독도 인근 해역에
서 조업중이던 어선에도 미군은 전쟁 발발 전부터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여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알려진 것만도 1947년 4월, 1948년 6월 8일, 1952년 9월 15일, 1952
년 9월 22일 네 차례입니다. 우리나라의 동쪽 끝에서 일어난 독도 학살은 전선
과 무관한 비전투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 특징인데, 미군은 조업 어부에 대해
어떤 보호조치도 취하지 않는 등 인종차별적 시각을 드러냈습니
다.
24. 대구의 진보인사를 싹쓸이하다 (대구 10.1사건)
대구 지역 중심
의 1946년 '10월 항쟁' 이후 미군정과 경찰은 수천의 관련자들을 검거하여 그
중 수백 명을 처형했고, 진압과 검거 과정에서도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습니
다. 또 항쟁에 연루되어 형무소에 갇혀 있던 이들과 풀려났다가 뒤에 국민보도
연맹에 강제 가입된 이들도 전쟁 발발 후 모두 학살당했습니다. 대구시와 인근
의 가창, 월배, 본리동, 성서, 칠곡, 경산 코발트 광산 등이 이와 관계 있는
주요 학살지입니다.
25. 제주 4.3사건도 여기서 말하는 민간인학살 사건인가요?
제주 4.3사건의
비극은 1947년 3.1절 행사중인 제주도민을 미군정이 강제해산시키고 이들을 향
해 발포하면서 시작됩니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하여 곧 총파업이 단행되었고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합니다. 결국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
대가 1948년 4월 3일 탄압에 항의하고 단선단정에 반대하며 봉기를 하게 되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개방 될 때까지 무장대와 토벌대는 끊
임없이 무력충돌을 거듭합니다. 이 과정에서 최소 3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합
니다. 당시 미군정은 얼마 안 되는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민 전
체를 상대로 '빨갱이 사냥'에 나섰으며 육지에서 온 토벌대는 약탈, 폭행, 방
화, 살해 등의 범죄를 수없이 저질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를 없애더라
도 미군정에 빌붙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고 이는 당시 경무대장이던 조병옥
이 "대한민국을 위해 전 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두 죽이고 모든 것
을 태워버려도 좋다"라고 말한 데서도 드러납니다. 요컨대 제주 4.3사건은 대
표적인 민간인학살 가운데 하나입니다.

26. 여순사건은 군대의 반란 사건 아닌가요?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
일 당시 여수에 주둔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는 제주 4.3사건의 진압 출동 명
령을 받고 "같은 민족에게 총을 쏠 수 없다", "미제 침략 반대", "단선단정 반
대"를 내걸고 부대를 이탈합니다. 반군은 20일에 여수시를 장악하고 곧이어 순
천, 구례 등 전남 동부지역 전체를 장악합니다. 하지만 10월 27일 진압군이 여
수시를 완전 진압하면서 사건은 종료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학살은 오히려
진압 이후에 대대적으로 자행되는데, 진압군은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했고 산으로 들어간 잔류부대원과 공비들을 소
탕한다며 마을 주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했습니다. 이렇게 학살당한 민간인의 수
는 여수, 순천, 구례, 광양, 보성, 고흥 등지에서 약 1만 명에 이릅니
다.
27. 지리산에 사는 죄? (산청, 함양)
빨치산 토벌차 지
리산에 온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1949년 7월 18일 산청군 시천면 신천리
설통바위 부근에서 매복중이던 공비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국군은 이 사건을
통비분자에 의한 것으로 보고 200여 명의 마을주민을 통비분자로 몰아 학살합
니다. 이 밖에도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군에 의한 주민 학
살 사건은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리산에 사는 '죄'밖에는 없는 수많
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28. 이발사의 외상장부가 살생부가
되다 (함양 도북마을 학살)
도북마을 학살은
1949년 9월 20일 낮 12시경 마을 주민 32명이 수동면 당그래산에서 빨치산 내
통 혐의로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사건 발생 직전에 마을 이발사 정주상이 경비
병에게 붙잡혀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당시 지서장 최홍식은 빨치산 내통자를 찾
는다는 명분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끌어들이는 참이었습니다. 결국 이발사의
외상장부에 적힌 마을 주민 32명이 고스란히 산으로 끌려가 학살당했습니다.
29. 전신주보다 못한 목숨 (고흥 전신주 사건)
1949년 5월 3일
밤 전남 고흥군 과역면 도천리와 남양면 노송리 경계 지점에서 전신주 약 10주
의 전선이 절단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빨치산은 토벌대의 연락망을
교란하기 위해 전선을 절단했고 이에 경찰들은 전신주마다 주민 한 사람씩을
붙여서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전선 절단 사건이 발생하면 주민들을 빨치
산 내통자로 몰아 살해하곤 했습니다. 당시 고흥경찰서에서도 5월 9일 마을 주
민을 다수 연행하여 고문한 후 주민 6명을 학살했는데, 전남 동부 전역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30. 토벌대인가, 학살부대인가? (문경 석달마을 학살)
석달마을 학살은
1949년 12월 24일 정오 24가구에 127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경상북도 문경군 산
북면 석봉리 석달동에 국군 2사단 제25연대 3대대 7중대 2소대의 무장군인 70
여 명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자신들에게 대접이 소홀하다는 것을 트집잡아 주
택 24가구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 전체를 마을 앞 논바닥과 마을 뒤 산모퉁이
두 곳에 모아놓고 학살한 사건입니다. 마을 뒤 산모퉁이에서는 석봉리 동회에
참석했다가 귀가하던 청장년들과 학교에서 하교하던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학살
되었는데, 단 2시간 만에 마을 주민 86명이 학살당했고 이 중 32명은 15세 미
만의 어린이였습니다.
(4편에서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