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4번 : 다르게 살 수 있는 권리 |
| 글쓴이: 둘하나 |
등록: 2003-08-27 13:11:34 |
조회: 1795 |
다르게 살 수 있는 권리, 차이를 견디는 지혜
: <동성애자 차별반대 공동행동>의 입장을 지지하며
서동진
번개를 즐길 줄 아는 이반들을 위하여
<동성애자 차별반대 공동행동(아래 공동행동으로 줄임)>이 정보통신윤리위원
회 앞에서'이반'들을 위한 폭염 속의 정오 번개를 때렸다. 나는 조금 신나고
조금 착잡하다.
남성게이들의 최대 채팅 사이트이던 이반시티가 문을 닫고 난 뒤, 열을 식힐
기회가 없던 이들에게 이것도 굳이 번개라면 번개다.
집회는 대열 속에 꼭 끼어야 제 맛이 아니다.
처음부터 의지가 한결같아서, 분노가 남다르지 않아서 데모 대열에 끼인 사람
은 없다.
데모 도사라도 처음엔 모두 아랫도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이 깜깜했던 법이다.
하물며 이반들끼리 모여 사위로부터 꽂히는 눈총과 기웃거림을 고스란히 감당
하며 집회를 여는데서야 오죽하랴.
그러나 백주 대낮의 번개를 나름대로 즐기는 법을 찾으면 된다.
대열에 굳이 끼지 앉고 먼발치에서 선글라스 끼고, 시치미를 떼고 구경꾼 행세
를 해도 된다. 그러다 어색한 지지와 공감을 보내는 어느 자랑 눈이 맞아 그
길로 지하철역으로 사라져도 좋다. 또 제비겁함에 낯이 벌개져 집으로 돌아가
다, 내친 김에 이태원으로 직행해도 좋다.
세상사는 게이, 레즈비언들이 다 데모에 나서서 좋을 건 없다.
연애에 목을 메는 이반도 있고,섹스에 열을 올리는 이반도 있을 수 있으며, 사
회운동이 제 이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몫이라고 자신하는 이반도 있을 수 있
다.
이반이라는 것이 정체성이고, 그 정체성을 사는사람들이 또 보이지 않는 경계
속의 사회를 이루고 산다면 그들이 죄다 데모에 나서는 건 있을 수 없다.
언제 때가 되어 정말 대다수가 "못 살겠다 갈아엎자"고 분격할 때가 온다면모
를까, (이 집회의 일선에 선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이까짓 건수로 다들 거리
로 쏟아져 나오는 건 재미없다.
그렇지만 그래도 주문은 있다.
당연히 게이라면 식의 논리로 같은 용량의 분노와 용기를가지고 너남없이 박해
와 차별을 거부하는 싸움에 동참하라는 주문은 적잖이 짜증스럽다.
그러나 적어도 한번쯤 자신의 이반 인생에서 이반의 자유와 권리를 내걸고 싸
우는 모임에 구경을 나가는 것까지 짜증스러워해서는 안 된다.
그건 당신 한 명의 고유한 실존적인 삶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친구를 위한, 혹
은 그 이름으로 대표되는 친구들의 무리를 위한 자리이다.
그 자리에 약간의 애정과 약간의 근심으로 발걸음을 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건 엄청난 윤리적 행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공감이 이반이란 공
동체의 정치적, 윤리적 동기를 작동시킨다(고 나는 믿는다).
당신이 만난 적이 없는 또는 만날 이유가 없는 친구라도 그들은 자기 삶에 충
분히 만남의 개연성을 갖고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인생에 딱 한번 눈길을 준다고 해서 나쁠 건 없잖은가.
그 날의 집회의 대의에 공감하고,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당신과
함께 사는 별난 우악스런 싸움꾼들, 일종의 친구라면 친구라 할 이들을 한번
구경하라.
그래서 그 날의 집회가 번개인 이유이다. "안 땡기면" 그/그녀와의 관계가 쉬
이 가능하지 않던 우리의 그 번개처럼, 당신은 그 번개에서 당신의 정치적 '스
타일'과 '성향'을 열어둔 채 나오면 된다. 번개를 즐기는 법을 몰랐다면 몰라
도!
평등의 정치학에서 차이의 정치학으로
이 글은 <공동행동>은 어떤 생각에서 이번 이반 인터넷 사이트 검열에 맞서 싸
울 것인가라는 점을 짚어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다.
이것은 나 역시 참여하는 <공동행동>의 공식적인 입장과 상관없다.
이 글은 공동행동이 내건 그 입장을 지지하는 나의 생각을 스스로 정리해보는
글이다.
그 점을 분명하게 밝혀둔다. 물론 이 글에 대한 반론과 시비는 열려있다.
적잖이 성마른 심정에서 쓰여진 글이니 허술한 곳이 많을 것이다. 그 의미심장
한 실수와 빈곤을 지적한다면 나로서는 유익한 일이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가이다.
이번에 공동행동이 내건 슬로건은 조금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다.
그간 레즈비언, 게이들이 모여든 집회에서 흔하게 울궈먹던 이야기인 평등이
니 인권이니 하는 말을 한켠으로 밀쳐두고 조금 뻔뻔해 뵐 수 있는 "다르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내세운다.
그간 "이반도 인간이다"는 주장으로 우리도 이 사회의 여느 사람들이 누리던
존엄과 권리와 행복을 우리 이반들도 누리게 해달라던 주장에 견주면 적잖은
비약이 있다.
그런 비약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런 비약을 가능케 한 저간의 배경을 나름껏 풀이해 보고자 한다.
먼저 "동성애자에게 평등을" 이란 구호가 갖는 선천적인 허약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평등이란 말인즉슨 이성애자가 누리는 삶의 권리만큼 성적 소
수자 역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만큼 살 권리를 달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이렇게 구체화된다. '이성애자들이 직장 다닐 권리를 가졌으니 우
리도, 이성애자들이 결혼할 권리를 가졌으니 우리도, 이성애자들이 가족수당
을 받으니 우리도..'
이런 식의 '사회적 권리'의 평등은 물론 중요하고 각별한 의미가 있다.
외국에서 들려오는 이반 동네에 관한 소식도 내내 이런 것 일색이다.
그게 중요하고 절박하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러나 이는 이성애자들과 맞먹으려드는 중요한 저항같지만 정작 이성애자와
우리의 삶을 가르는 문제를 희미하게 만든다.
우리는 평등이란 구호 앞에서, 모두 성정체성의 차이를 떠난 시민이란 정체성
을 걸쳐야 한다. 물론 이 때의 시민이란 "성정체성의 차이를 막론하고" 라는
전제에서 드러나듯 성을 추상한, 중성적인 개념이다.
물론 그 시민이란 말이 좋아 시민이지 그 사회의 다수인 이성애자의 삶의 현실
만 상징하는 시민이란 것은 세상이 훤히 아는 사실이다.
물론 이 때의 다수란 수적인 다수가 아니라 그 사회를 인식하고 체험하는 원칙
을 점하는 자들이란 의미에서의 다수이다.
다수는 단순히 양적으로 많고, 수적으로 강해서 힘이 센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네 삶을 자연, 규칙, 섭리, 정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 바깥의 것
을 죄다 배제한다.
그래서 시민이란 말은 법 앞에서 평등한 우리 모든 낱낱의 개인을 뜻하지만
그 법이 이성애자들이 사는 세상을 전제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동성애를 일종의 성행위로 간주하고, 수간이나 근친상간, 원조교제 옆
에 나란히 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 이반에겐 넌센스이지만 시민들 - 당연 괄호쳐진 (이성애자) 시민들- 에
게 그것은 센스이다.
우리 이반도 인간이라고 우기지만, 그들에겐 또 다른 논리가 있다.
우리도 인간의 종이라고 우긴다고 "인간은" 이란 주어의 의미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란 집합에 우리를 포함시켜 달라는 산수는 지극
히 옳다.
그러나 강조하지만 동성애자도 인간이란 것은 포함과 배제의 산수의 논리가 아
니다.
의미로 꽉 찬 사회적 세계에서 동성애자가 인간이 되는 것은 포함의 논리를 따
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성정체성에 따라 분류되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이반시티를 비롯한 사이트들이 문을 닫자, 정숙하고 조신한 이반들이 나서
서 "그럴 만도 하다", 나아가 "사실 우리가 해도 너무했다"는 주장을 펴는 것
을 종종 본다.
아예 어떤 이는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서 "그렇게 음란하고 퇴폐적인 사이트는
이성애자 사이트의 음란 사이트 폐쇄처럼 페쇄되어야 마땅하다"는 평등의 논리
를 편다.
당연히 이성애자 사이트가 청소년 접근을 막듯이 동성애자 사이트도 막아야 평
등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 역시 산수적으로 옳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산수적인 평등의 논리가 위험하고 또 한치도 우리에게 유익
하지 않는다 생각한다.
'순수사랑', '진정만남', '오직대화' 같은 닉을 즐겨 쓰는 이반들이랑 '준수바
텀', '쌔끈스탠', '지금종로' '빨아줘' 란 닉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이
가 있을까.
물론 그 사이엔 어쩌면 상당한 윤리적 차이가 끼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이반들 내부에서 성에 대해 생각하는 서로 다른 선택과 입
장의 차이이다. 그것은 동성애와 상관없다. 성을 즐기고 대하는 우리 개인의
자질과 선택의 차이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동성애란 정체성을 얘
기할 때 일단 그것은 밀쳐두기로 하자.
그러나 이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 있다.
이 모든 닉이 사용되는 장소, 이 모든 닉을 내걸고 만남을 추구하는 장소는 우
리 모두가 공유한다. 그 공유하는 장소는 인터넷 사이트라는 물리적 장소가 아
니라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그런 뜻에서 문화적 의미가 두둑하게 포함된
공간이다.
왜 이반은 섹스를 전제로, 왜 외모를 기준으로, 왜 성향을 선택지로 만나고 대
화할까.
이상과다성욕자들이어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건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갱년기엔 몇 번씩 섹스해야 행복한지, 신혼 초엔 얼마나 자주 섹스해야 정상인
지 열심히 통계내고 진단하고 해부하는 건 우리 이반들보다 이성애자들이 더
열심이고 더 강박적이다.
차라리 우리는 평온하게 너남할 것 없이 다들 색광이라고 거의 확신하며 사는
편이다.
그럼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이성애의 이중과세 ?
나는 이를 혼자서 곧잘 "이성애의 이중과세"라고 부른다.
먼저 우리는 동성애자의 눈길로 자신의 동성애에 눈뜨는 경우가 없다.
나를 비롯하여 아마 대다수의 게이들은 자신의 삶에 끼어 든 동성에 대한 성
적 관심과 친밀감을, 자기 삶의 재수없고 불행하고 끔찍한 속성과의 만남으로
시작하는 편이다.
"아, 나는 대체 왜 이럴까" 에서 왜 이럴까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제 주변의 동성에 대한 성적 매력과 호기심이다.
그 때 우리는 겁나고 불쾌하고 슬프고 죽고싶고 뭐 그런 식의 감정의 혼란에
휩싸인다.
이때 나는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을 동성애자라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보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반으로서의 삶의 시작을 그렇게 제 안의 이성애의 눈으로 본 제 삶
의 떨쳐버리고 싶은 슬픈 한 부분과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다시 말해 우리 이반은 내 삶의 다른 영역, 내 삶을 이루는 소중한 다른 부분
들(일, 공부, 취미 등등)을 무의미 속에 가둬놓고 오직 자신의 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이반으로서의 운명에 눈뜬다. 그러나 이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시작한 자신의 삶을 읽어들이는 지극히 이성애적 눈길은, 자신
과 같은 부류의 사람 즉 같은 이반을 보는 눈길로 이어진다.
내가 내 성이란 부분을 통해 나를 깨닫듯이 나는 그/그녀의 성이란 부분을 통
해 그/그녀가 이반 임을 깨닫는다.
그가 돈을 잘 벌어서, 그가 공부를 잘해서, 그가 선행을 해서, 그가 이반임을
깨닫는다는 것은 미친 논리이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만나고 떠들고 하던 사이에 만들어진 사회적 공간을 통
해 비로소 소급적으로(사후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그런 성에 의해서만 포착
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이상의 삶의 의미를 갖는 사람들이란 걸 깨닫는
다.
그래서 이반들은 뭔가 끼가 있고, 이반들은 뭔가 이런 버릇이 있고, 이반들은
뭔가 이런 습관이 있고 식으로 이야기를 짜고 엮는다.
요컨대 우리는 이제 우리가 한 때 떼어두고 가둬두었던 우리 삶의 다른 부분들
을 자신의 성정체성과 조심스럽게 연결한다.
"그래 난 이반이어서 패션디자이너가 된 거야, 그래 난 이반이어서 축구선수
가 된거야, 그래 난 이반이어서 운전사가 된거야." 식의 논리는 그렇게 사후적
으로 작성된다.
이를 요약하면 이럴 것이다.
먼저 우리는 이성애의 눈길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바로 그 눈길을 통해 또 자신과 같은 류(類)를 이루는 사람
을 알아보고 그와 사회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눈길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 것은 바로 그런 사회를 통해 서로의
삶을 체험했을 때, 우리끼리 우리의 특성을 이해하는 언어를 찾아냈을 때이
다.
그 때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성이라는 좁은 통로를 통해서만 보지 않는
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찾는 방식을 결정했던 성의 일차적인 의의는 사
라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이반으로서 출생하고 성장
하는 데 있어 피할 수 없는 경로이기 때문이다.
그건 이성애가 만들어놓은 동성애자되기의 철칙이고, 다른 동성애자 만나기의
철칙이다.
그런데 이 철칙이 또 문제이다.
이성애의 이중과세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과세가 "이성애의 눈길로 네 성에 대해 눈떠라!" 였다면,
두 번째 과세는 "바로 그 눈길을 통해 네 성을 처분하리라."이다.
우리가 이성애적 눈길을 통해 만들어진 그 삶의 철칙을 통해 동성애자되기를
할 때, 이성애는 이제 그것의 음란함과 외설스러움과 퇴폐스러움에 관해 게거
품을 문다.
제가 만들어 놓은 삶의 논리를 쫓아 동성애자되기를 하는 우리 풋내기 이반들
에게 이젠 바로 그 논리를 만들어 놓은 자신의 입장을 들먹이며 이반들을 색정
광으로 몰아붙이고 아예 금치산자로 몰 듯이 군다.
이런 식의 생각은 "나는 동성애자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성생활은..." 이라는 논리의 반쪽 짜리 진보성을 밝
히는데 도움을 준다.
이반으로서, 그들의 삶의 정체성을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들이 살 수 밖
에 없도록 걸쳐진 삶의 규칙 - 비록 그것이 불변적인 것이 아니고 운명적인 것
이 아니더라도 - 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겉보기에 제법 리버럴한 이성애자의 발언은 결국 그 속내
엔 "당신이 이성애자의 눈길로 당신의 삶을 보는 한"이란 전제가 붙어있고,
또 그런 전제가 있는 한 이반은 영원히 성의 굴레에 갇힌 괴물이고, 불쾌한 타
인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평등으로
이런 생각이 이반들의 음란한 성생활을 두둔하기 위한 궤변이고, 자신의 부도
덕한 욕망을 은폐하기 위한 말장난이라고 몰아붙이면 달리 할 말이 없다.
내게 있어 그것은 결국 '다름을 언제나 같음의 편에서만 받아들이겠다는, 자신
과의 같음이란 조건 속에서만 다름을 선택적으로 인식하겠다는, 다름을 언제
나 같음의 식민적인 상황 속에 둘 때에만 안심하겠다,' 는 소리로 여기지 않
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의사소통의 실패는 설득력의 부족이 아니라 '서로가 속한 삶의 장
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 일 뿐이다.
이제 슬슬 결론을 내릴 때이다.
나는 <공동행동>의 '다르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지지한다.
그것은 이성애자들처럼 살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평등과 인권의 구호보다
내겐 더 듬직하다.
그러나 가장 나를 안심시키고 기쁘게 하는 것은 그 슬로건이 이제 내 삶을 소
외시키지 않는 점이다.
나는 성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내 삶의 열쇠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다.
그러나 그것이 동성애자되기를 겪은 내 삶의 역정에서 내 삶을 동성애자로서
구성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몫을 차지하고 있고 차지한다는 생각을 부인하지 않
는다.
그걸 부인한다면 그건 위선이다.
그건 정치적인 문제에 앞서 내가 내 삶을 겪은 불가피한 경로였고 현실이었
다.
나는 청소년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에 대해 눈을 뜰 때, 그들에게 필요한 정
보는 어쩔 수 없이 성에 대한 정보이며 그것이 그들의 자기의 동성애자됨을 식
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임을 추호도 의심않는다.
그것은 그들에게 섹스를 권유하는 것도, 원조교제를 고무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느끼는 한, 그리고 자신의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
어하는 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말고 아무것도 없
다(설마 이걸 섹스에의 권리라고 오인하는 멍청이가 없길 바란다. 섹스의 체험
과 성적인 몽상과 자기 이해를 구분 못한다면 그것은 천치이다).
그러나 '그래도 양보할 건 양보하고 숨길 건 숨기면서 사회적 상식과 타협하
고 성인들만을 위한 동성애자 사이트라도 어떻게 지켜보자,' 고 주장하는, 그
리고 '건전한 동성애자 사이트마저 죽게 할 수는 없다.' 고 주장하는 입바른
체 하는 사이비 현실주의적 논리에, 나는 승복할 수 없다.
동성애자를 성이라는 유리창을 통해서만 인식하는 한, 동성애의 어떤 사소한
성행동도 결국 음란하고 외설스럽다.
동성애가 '성' 정체성인 한 우리는 그런 성의 유리창 바깥으로 비껴날 수 없
다.
설마 당신은 '이반들의 섹스는 일반들의 섹스와 똑같고, 이반들의 입맞춤은 일
반들의 입맞춤과 똑같다.' 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입맞춤은 그 언제 어디서나 이성애자의 성교를 능가하는 외설스럽고
음란한 행위 아니던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양보의 기회는 별로 없다.
우리가 성인이 되는 것, 우리가 금욕주의자 되는 것 그것은 동성애자이기를 포
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을 통해 자신의 동성애자임을 눈치채고 자신의 벗을 만나고, 자신의
사회를 만든다. 성이 없는 동성애란 결국 동성애의 소멸이고 부재이다.
그렇다면 평등은 결국 차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평등해지는 것은 이성애를 통해서만 성을 인식하는 성의 논리를 물먹일 때만
가능하다.
동성애자와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꾼다면 그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현실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차이를 부인하고 다름을 삭제하는 한 불가능하다.
우리는 동성애자들에게 겨눠진 차별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차별없는 사회에서 살 수 있는 권리가 건전한 동성애자로서 사는 한
에서의 권리라면 나는 처음부터 이율배반의 덫에 우리를 몰아넣는 것이라 믿는
다.
우리가 아무리 건전해 봤자 우리의 음란함이란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는다.
성을 통해서만 자신과 타인을 식별하고 체험하도록 조건지워진 이성애 사회에
서 우리가 건전해질 수 있을 기회란 전무하다.
결국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가려면 우리의 다름을 견디는 사회여야 한다.
타인을 평등한 삶의 지평으로 옮겨오도록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불편한 차이
를 견뎌내는 일에서 시작한다.
이반들과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려면, 이반들을 차별로부터 벗어나 '인간답
게' 살 수 있도록 하려면, 이성애적 규범 속에서만 포착되는 인간에의 상상을
포기해야 한다.
나는 이런 차이의 인정이 평등을 위한 기초적 원리라는 것을 영원히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게이인 한 내가 내릴 수 있는 정치적 결론은 이것 뿐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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