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5번 : 세모의 밤, 불타는 쌀 / 고재종 님 |
| 글쓴이: 사람사랑 |
등록: 2003-12-17 17:58:35 |
조회: 515 |
세모의 눈
설코기를 나눌 돼지를 잡고도
한사코 회한과 허망함으로 떨던 저물녘
눈은 동구 밖 주막집의 막걸리잔에나 붐비더니
귀향할 살붙이들 길 걱정되는 이 밤에
눈은, 플래시불을 밝히고 광에 나가
나락씨며 토란씨며 각종 씨오쟁이를 살피고 나오는
아버지의 호호백발 위에 지천으로 붐비나니
눈이여, 쓸쓸하고도 따뜻한 노여움의 눈이여
나는 봄에 빚은 매실주 한 병 챙겨들고 네 속을 걸어
고향을 뜨겠다는 참등집 석현형을 그예 말리러 가누나
불타는 쌀
쌀을 불태우는 저 눈빛 보아라
제 자식 죽는 꼴은 못내 보아도
가물에 타는 벼 한 포기는 못 보던 눈빛이다
쌀을 불태우는 저 손길 보아라
쌀 한 톨 생산하는 데 여섯근 반 땀 흘리고
여든여덟 번 어루만지던 그 손길이다
쌀을 불태우는 저 근력 보아라
조석으로 싱싱한 쌀밥 고봉 먹고
온갖 불의 불끈불끈 떨쳐 일어서던 그 근력이다
아,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이땅 어느 누가 쌀을 불태울 수 있는가
쌀을 불태우는 저 사랑 보아라
쌀이 곧 생명인 자기를 죽여 쌀을 지켜
이 땅의 참된 밥을 세우려는 피맺힌 사랑이다
* 시 : 고 재 종 님
* 시인의 말씀 :
" 농민은 우리 민족의 원형이다.
농민도 사람답게 사는 날이 올 때까지
난 농민 시인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가을이 왔어도
더는 거둘 것 없는 이 땅이 어찌 말이나 되는가."
- 1992년 가을. 시집 [사람의 등불] 후기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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