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이전까지의 한국의료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의료는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환경에 직면하게 
된다. 의료가 '영리 추구'를 기본 원리로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과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자영업 형태로 개별적 수익 추구에 몰두하던 의료관행은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대기업의 의료산업 진출과 함께 고도로 기업화·상업
화되기 시작했다. 대기업 소유의 병원들은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기업적 방식
의 수익 추구'를 보편적 의료관행으로 정착시키면서 이후 병원산업 변화의 흐
름을 선도하게 되었다.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제도 시행은 의료이용의 경제적 부담을 크게 경감시켜주
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의료보험제도는 영리추구적 민간의료가 급격히 팽창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의료보험제도 실시 이전에는 경제적 장벽으로 인해 의
료 필요(Need)가 수요(Demand)로 이어지지 못했으나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면
서 의료이용 가능인구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전체 병
상 중에서 민간의료가 차지하는 비율이 의료보험제도가 처음 시행된 1977년에
는 46.8%에 불과했으나 2000년에는 84.5%로 크게 늘어났다. 게다가 의료공급자
가 환자에게 제공한 의료서비스 하나 하나에 대해 경제적으로 보상해주는 보상
체계(행위별수가제)는 민간의료의 영리추구 성향을 극대화시켰다. 민중의 보험
료로 모은 공적 기금(의료보험)이 의료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지렛대로 활용되
기는커녕 민간의료가 덩치를 키우고 영리추구 성향을 극대화시키는데 불쏘시개
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의료의 기업화·상업화와 영리추구 성향이 극대화된 민간의료의 확대는 의료시
장의 경쟁 격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대다수 의료공급자가 수익 추구에 전념하
게 되면서 의료이용자와 의료보험의 지출은 계속 늘어나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건강보험재정 파탄은 애초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보건의료개혁은 한국의료의 본질적 모순을 한치도 해결하지 못
했다. 오히려 한국의료에 내재한 모순이 김대중 정부의 양대 개혁으로 불리는 
의료보험통합과 의약분업을 거치면서 폭발했다. 수 차례의 의사파업과 건강보
험재정 파탄, 그리고 보험료와 본인부담금이 연이어 인상됐다. 2000년 4만5천
원에 불과하던 직장가입자의 월 평균 보험료가 2003년 현재 7만7천원으로 3년
만에 1.7배나 올랐다. 그러나 보험혜택 늘어난 것은 찾아보기 힘들고, 전체 진
료비의 절반에 달하는 과도한 본인부담금 수준도 그대로이다. 도리어 "우리나
라 국민이 선진국 국민보다 의료이용을 많이 한다"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본
인부담금을 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본인부담
금이 거의 없는 선진국이 우리나라보다 의료이용률이 낮은 현상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저소득계층인 의료급여환자에 대한 차별과 감시도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이 와중에 영리추구적 민간의료를 견제할 수 있는 공공의료기
관은 양적·질적으로 오히려 퇴보했다. 김대중 통치기간 중 통폐합된 보건소, 
보건지소, 보건진료소는 각각 3개, 5개, 59개이며, 지방공사의료원의 경우 현
재까지 2개의 의료원이 매각되었고, 3개 의료원이 위탁운영되고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공공의료기관도 '수익성' 압력에 내몰리면서 '공공의료'라는 말을 하
기가 낯부끄러울 정도로 영리추구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양대 
개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지난 5년간 민중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부
담이 너무나 크다.


노무현 정부의 보건의료개혁 전망

노무현 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기본 골격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
다. 일부 전향적인 정책이 있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실현가능성이 떨어지거나 
조삼모사(朝三暮四)식의 맞바꾸기 정책이다.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인 보건의료
정책으로 이르면 올 상반기 중에 도입될 '본인부담 상한제'를 보자. 식구 중에
서 누구 한 명이라도 중한 질병에 걸리면 집안살림이 거덜나는 현실에서, 일
정 기준을 초과하는 본인부담금을 건강보험에서 부담하는 제도의 도입은 분명 
반길 일이다. 그런데 정부안에 따르면 본인부담 상한제 도입에 필요한 재원
을 '가벼운 질병에 대한 본인부담금을 높여서' 마련할 예정이다. 중한 질병의 
본인부담이 과한 것이 문제이지, 가벼운 질병의 본인부담이 경한 것이 문제가 
아닌데도 말이다. 게다가 가벼운 질병의 본인부담도 외국과 비교해 볼 때 결
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외래진료비에서 본인부담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비교
해 보면, 우리나라는 60% 이상인데 반해 대다수 서구 선진국의 경우에는 20% 
미만이거나 무료이다.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정책은 공공의료기관을 30% 수준으로 확충하고, 건강보험
의 보장성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건의료체계 전반이 무제한적인 경
쟁구도로 재편되고 상업적 속성이 극대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정책이 실현
될 수 있을지 그리고 설사 실현된다 하더라도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
다. 만성적인 건강보험재정 위기로 민간의료보험 도입 주장이 힘을 얻고 있
다. 건강보험만으로는 스스로의 건강을 제대로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미 
많은 이들이 민영 암보험과 각종 질병보험에 가입했다. 의료공급자들은 더 자
유롭게 돈벌이에 치중할 수 있도록 그 동안 유지되어 오던 최소한의 규제조차 
폐지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만큼 의료공급자 마음대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곳도 세계적으로 드문데도 말이다. 의료환경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자영업적인 수익 추구에 안주하던 상당수의 중소병원이 경쟁구조에서 
탈락하면서 경영위기에 몰렸다. 이들은 의료의 공공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의 
공적 개입은 일체 거부하면서, 감소된 수익 회복을 위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을 거세게 요구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1차 의료시장 개방안을 제출하지 않기
로 방침을 결정했지만, 경제자유지역을 근거로 한 외국 의료자본의 국내 진입
은 이미 시작되었다. 국내 의료자본은 '의료시장 개방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경쟁력 확보'를 명분으로 '수익' 중심으로 병원체질을 개선하는데 박차를 가하
고 있다. 겹겹이 둘러싼 이런 도전을 뚫고 노무현 정부가 자신의 공약대로 전
국민건강보장제도를 구축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실행가능한 정책으로는 문
제의 본질은커녕 껍질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고,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기 위해
서는 너무나 근본적인 해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빼앗긴 것은 『상록수』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의 보건의료개혁에 대한 '환상'은 끊임없이 생
산·유포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규정하는 이들조차 보
건의료에 관한 한 상당한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보건의료계열 
노동운동 내에서도 '노무현 정부에 대한 참여를 통한 개입' 따위의 말들이 공
공연히 나돌고 있다고 한다. 말이 좋아 '참여를 통한 개입'이지 신자유주의 정
부가 그런 식으로 '개입' 당할 만큼 녹녹한 상대인가? 그런 식으로 '개입' 당
한 정부였으면 이미 예전에 '개입' 당했을 것이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정부는 
대중운동으로 하여금 '참여를 통해 뭔가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빠지
게 만듦으로써 대중의 직접 행동을 유보시키고, 관리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보
건의료영역에서 이루어질 노무현 정부의 시민사회에 대한 동원과 포섭은 김대
중 정부의 그것보다 더 세련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체의 '개입'이나 정책적 조율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개입'이 '개
입'으로 작용하려면 든든한 현장운동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재는 그 운
동력이 극히 취약한 상태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는 '개입'이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붕괴된 현장운동력을 복구하고 대중
의 직접 투쟁을 조직하는데 매진하기보다 정부와의 정책적 조율, 정관계 유력 
인사와의 의사소통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그 운동은 정책적 성과
는 따 낼 수 있을지언정 운동기반은 더 철저히 붕괴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지
도부는 살고, 현장은 죽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정부가 원하는 대중운동의 
미래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 시기 노무현의 『상록수』를 들을 때, 나는 왠지 모를 박탈감을 느
꼈다. 나의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뺐기는 그런 씁쓸한 기분을 말이다. 그런데 
노무현은 우리에게서 『상록수』만을 앗아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는 우리에게서 운동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대중이라는 바다와 그 속을 헤엄치
는 푸르른 영혼을 앗아갈는지도 모른다. 



* 본 칼럼은 2003년 3월 2일자 연세대학원 신문 1면 기획논단에 기고한 「심화
되는 민중건강의 위기」의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 본 칼럼은 민중의료연합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