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편 : 살인면허:작전지역 내의 모든 인간은 죽여도 좋다

48.
보11사 9연대 작명 제5호 (거창산청함양 사건)
1951년 2월 초 거창,
산청, 함양 등 지리산 남부 지역의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제 11사단 9연대
는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합동작전에 돌입했는데 그 명령은 "작전 지역
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으로 공비토벌이라는 명분
하에 인근 마을주민들이 죽음으로 내몰렸으며, 2월 8일 산청, 함양 2개군 4개
마을에서 민간인 700여 명이 학살되었고 이어 2월 9일에는 거창 신원면에서
719명이 학살되었습니다.
49.
살려면 모두 나오라더니... (화순 학살)
1950년 11월 17일 땅거
미가 질 무렵 국군 11사 단 20연대 소속 군인들이 화순군 남
면 다산마을의 마을회관 및 마을 앞 논에서 주민들을 학살하고 1951년 3월 17
일 이른 아침에도 도암면 도장리에서 주민을 학살하는 등, 당시 화순군 일대에
서는 통비분자라는 혐의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새벽에 마을로 들이닥
친 국군은 가가호호 방문하여 "살려면 모두 나오라"고 한 후 영문을 모른 채
나온 주민들 중 군경가족을 제외한 마을 주민을 무차별 학살했습니
다.
50. '학살부대'의 광기 (함평 사건)
1950년 12월 6일에서 1951년 1월 12일 사이에 공비 토벌을 목적으로
작전을 벌이던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가 함평군 월야, 해보, 나산
면 주민 524명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마을에 주둔하던 국군은 빨치
산과의 교전에서 국군 2명이 사망하자 마을 주민들을 통비분자로 몰며 몰살했
습니다. 당시 5중대 연락병이던 이는 빨간 볼펜으로 쓴“함평군 월악리 양민학
살의 건 또또또, 암호명 또또또또, 계속 기적행하리 또또…”와 같은 이상한
편지들을 가끔 유족회로 보내왔다고 합니다. 함평 사건은 4대 국회의 "양민학
살진상조사특위"에서도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51.
다도면 소개작전 (나주 학살)
국군 11사단 20연대 2
대대 5중대는 함평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뒤 1951년 1월 20일 영산포를 경유,
나주 세지면으로 진군하여 오봉리 동창교에서 주민 136명을 학살했습니다. 군
인들은 노점숙씨가 업고 있던 아기가 울자 당시 8개월 된 아기까지도 쏴죽였으
며 이어 인근 논밭에서 농사 준비를 하던 주민 40여 명도 모두 총살했습니다.
1951년 2월 26일에는 나주 봉황면 철천리 동박굴재에서 3개 마을 주민이 경찰
과 경찰특공대에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52.
일본도로 내리치고 기관총을 난사하고 (남원 강석리 학살)
제2전선에서 국군 11사
단이 저지른 민간인학살의 규모와 잔인성을 보면 이들이 과연 사람이었나 하
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국군 11사단 205부대의 1개 대대 병력은 1950년
11월 17일 새벽 5시 남원군 대강면 강석리 마을 앞 논바닥에 마을 주민과 피난
민 등 500여 명을 모이게 한 뒤, 청장년 남자들은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총살
하고 부녀자는 마을회관 뒤 숲에서 대검으로 난자했으며 노인들은 마을 회관
앞에서 일본도로 목을 쳐 학살했습니다. 3시간 동안 마을 주민 90여 명이 통비
분자로 몰려 학살당하고 마을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순창, 고창,
정읍 등지에서도 이런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53.
영원히 사라져버릴 뻔했던 마을 (영암 등 전남 일대)
1950년 7월 13일 영암
군 금정 덤재에서 200-250명, 10월 17일 구림에서 80여 명, 1950년 12월 18일
연보리 차네골에서 161명 등을 경찰과 국군이 보도연맹원과 부역혐의자라는 이
유로 학살했습니다. 차네골에서는 약 200명의 주민 중 30여 명만이 생존했으
며 마을은 모두 불탔습니다. 가해 군인들은 "너희들이 빨갱이를 키워 우리 동
료가 죽었다"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강제로 외치게 한 뒤 학살했습니다. 현
재 10여 가구만 남은 차네골에서는 같은 날 모둠제사를 지내고 있습니
다.
54.
눈 덮인 겨울산에서 쓰려져간 사람들 (불갑산 학살)
1951년 2월 국군은 영
광군 불갑산에서 빨치산 소탕작전인 일명 "대보름 작전"을 벌이면서 함평, 영
광 등지에서 몰려든 주민들을 집단학살했습니다. 불갑산 학살은 불갑면 쌍운
리 내산서원 근처 야산에서 유골이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 잔혹한 진실
55.
인민군으로 위장하여 민간인 학살 (나주부대 - 완도 학살)
나주부대가 지나간 길은 학살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나주 경찰(일
명 나주부대)은 1950년 7월경 퇴각하면서 인민군으로 위장하고 완도 등 전남
서남부 일대에서 민간인 수천 명을 학살했습니다. 1950년 7월말 인민군의 대공
세에 밀려 완도까지 퇴각한 나주부대는 인민군으로 가장한 채 완도중학교에서
환영 나온 주민들을 학살한 것을 시작으로 사안, 횡간, 신지, 노화, 청산, 보
길도 등지에서 수많은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 지역 섬마을들의 제삿날은 한
날 한시인 경우가 많습니다.
57.
열 대의 버스에 실려온 사람들 (지리산 외공리 학살)
1951년 2월 하순 산청
군 시천면 외공리에 군용트럭을 앞세운 11-14대의 버스가 피난민 행색의 민간
인을 가득 태워왔습니다. 군인들은 이들을 소정골 앞 골짜기로 끌고가 구덩이
앞에 한 사람씩 세워 학살했습니다. 이렇게 학살된 수는 최소 400명으로 추정
됩니다. 외공리 학살은 타지에서 끌려온 사람들인데다 생존자가 한 사람도 없
어 진상규명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하지만 1999년 일부 유골 발굴시에 유류품
이 함께 나와 진상파악의 단서가 생겼습니다.

58.
황해도 신천 학살
북한 지역에서는 인민
군 퇴각시 인민군에 의한 우익인사 학살,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수십만
의 주민 학살, 미군과 국군 진주 이후에 일어난 학살들이 다양하게 일어났는
데, 구체적인 진상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중 1950년 10월 17일
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에 황해도 신천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무
려 3만 5,383명이 미군과 우익청년단에 의해 학살된 신천 학살은 당시 지역사
회의 죄우익 대립이 미군 진주 전후에 어떤 양상으로 격화되어 엄청난 비극을
몰고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