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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6번 : [100문100답]7편:유족회 활동이 이적행위?
글쓴이: 학살규명 등록: 2004-11-24 16:31:57 조회: 181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100문 100답

발행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ㅣ 편집 사무처ㅣ삽화 박건웅ㅣ발행일 2004년 11월 23 일

 

7 편 : 학살문제 외면하는 우리사회가 피해자와 유족을

        두 번 죽이고 있 습니다.

 

59. 이렇게 많은 사건이 있었는데도 어떻게 그동안 이 문제가 묻혀 있었나요?

전쟁 이후 50년 동안 우리 사회는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의 포로였습니다. 전쟁중에 이유 불문하고 국군이나 미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리던 시대 였고 한번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할 만큼 잔 혹한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학살 사실을 발설하는 순간 발설자 역시 똑같 은 '빨갱이'로 몰리는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유족들은 피해자임에도 오 히려 피해 사실을 숨기고 그 한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야만 했고, 심지어 는 '연좌제'의 피해를 당하면서까지도 오로지 살기 위해서 그 고통스런 기억 을 머리 속에서 지우거나 야만의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기억을 재구성해야만 했습니다. 사건을 목격한 이웃들 역시 눈이 있어도 못 본 척,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척하는 삶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사건은 서 서히 수면 아래로 묻혀갔고, 우리 사회는 커다란 종양을 안은 채 병적인 상태 를 유지해오면서 계속되는 국가폭력과 인권유린, 무관심과 이기주의와 냉소 등, 온갖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한국전쟁기의 100만 민간인 학살 문제는 더더욱 사회의 금기가 되었고, 언론도 학자들도 심지어는 사회운 동가들까지도 문제를 외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학살은 없던 일이 되었 고, 사라진 100만의 고귀한 생명은 기록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부존 재'가 되었습니다.

 

60. 피해자임에도 연좌제의 고통을 당했다니...

이승 만 독재정권은 권력을 장악, 유지하기 위해 무수한 국민을 학살했고 이후 들어선 군사독재정 권들도 공포정치를 통해 국민의 권리를 박탈하면서 학살 사실을 은폐해왔으 며, 연좌제까지 만들어 유족들의 공직 진출이나 해외 이주를 막았습니다. 이 런 폭압적인 사회에서 피해 유족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을 위해 선거 때면 보지도 않고 줄곧 '1번'만 찍는 파탄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고통 어린 반세 기를 살아온 유족들은 당시를 증언하며 "내 나이 열두 살로 돌려달라"고 흐느 끼곤 합니다. 이렇듯 피해를 입고도 그 사실을 속시원하게 토로조차 하지 못했 던 유족들의 삶은 사실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습니다.

 

61. 유족회는 언제부터 활동을 시작했나요?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전국의 유족들은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학살자 처단 등 을 요구하며 유족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경남의 동래, 진영, 마산, 창원, 김 해, 금창, 밀양, 함양, 경북의 문경, 경산, 경주, 대구 등지에서 피학살자 유 족회가 결성되었고, 1960년 6월 16일에는 경북을 포괄하는 '경북지구피학살자 유족연합회'가, 8월 28일에는 '경남지구피학살자유족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10월 20일에는 서울 종로의 전 자유당 회의실에서 경상남북도의 시군 유족회 대표 50여 명이 모여 '전국유족회'를 창립했습니다. 유족회는 유골을 발굴하 여 합동묘역을 조성하고 지역별로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한편 대통령, 국무총 리 등 정부 각 기관과 국회 등에 청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1960년 4대 국회는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구 성하여 학살사건을 조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62. 1960년에 이미 국회에서 민간인학살 사건을 조사했다는 말인가요?

유족들의 진상조사 요 구가 높아지고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1960년 5월 23일 제4대 국회 제19차 본 회의에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경남반, 경북반, 전남 반으로 나누어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특위는 1960년 5월 31일부터 11일 동안 현장을 조사한 후 행정부에 대한 건의안을 포함한 <양민학살사건진상보고서 >를 제출했는데, 보고서에는 경남의 거창, 거제, 함양, 동래, 산청, 울산, 충무, 구포, 마산, 산청 등지에서 3,085명, 경북의 대구시 일대, 대구 형무 소, 문경 등에서 2,200명, 전남 함평군에서 524명, 전북 순창군에서 1,028명, 제주도에서 1,878명 등 총 8,715명의 양민이 학살됐고 10,041호의 가옥 피해 가 발생했으며, 이마저도 전체 피해의 일부만을 조사한 것에 불과해 피해 신고 가 증가일로에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4대 국회는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을 위원회에 출석시켜 신중하게 토의한 결과, 이를 행정부에 이관하여 장 시일에 걸쳐 정확하고 상세한 실정을 조사토록 결의했습니다.

 

63. 국회에서 조사한 사건에 대해 왜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런 조치가 취 해지지 않았나요?

1961년 5.16군사쿠데타 가 일어나면서 진상규명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고 반 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혁명공약을 내세운 5.16 쿠데타 정권은 극우반공 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유족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 별조치법'을 만들어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들을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검찰은 이들이 반국가단체를 결성하여 북측을 이롭게 하고 좌익용공의식을 고취했다 는 이유로 8개 유족회 간부 27명에 대해 사형, 무기 등 중형을 구형했고, 재판 부는 '특수반국가행위' 죄를 적용하여 사형 1명, 징역 15 ~ 5년 12명 등을 선 고했습니다.

 

64. 유족회 활동이 '이적 행위'였다니 놀랍습니다.

당시 재판에 회부된 유 족회 간부들은 '이적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최고 사형까지 언도받았습니다. 게다가 유족들을 검거하면서 유골발굴일지와 유골 수집철, 피학살자 조사명 부, 유족회원 가입명단, 학살자 고발장, 유골 상자 등 학살 진상규명에 결정 적 단서가 될 관련 기록물들을 남김없이 압수, 폐기하여(5.16 군사정부 포고 령 제18호) 이후의 학살 진상조사를 원천 봉쇄했습니다. 또 피학살자들의 합 동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불사르거나 바다에 내다버리고 비석을 뽑아 부수는 부관참시까지 자행했습니다. 이로써 민간인학살은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 기가 되었고, 1987년 이후까지 진실이 은폐된 채 강요된 침묵의 세월이 계속되 었습니다.

 

65. 지금도 유족회가 활동중인가요?

1987년 이후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유족들이 드디어 용기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활동중인 30여 개유족회는 1987년부터 1990년대 사이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동 안 각지의 유족회는 지방의회, 국회, 청와대 등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 하는 청원과 진정을 수없이 내며 지역에서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또 흩어진 유족들을 찾고 학살지를 추적하는 등 학살의 증거들을 모아왔습니 다. 그리고 각 지역, 사건별 유족회가 뜻을 합쳐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 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전국유족협의회'를 결성하고 전국의 민간인학살 문제를 통합 해결할 것을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 다.

 

학살 문제의 해결을 늦추는 것은 국가와 사회의 직무유기

 

66. 고령인 유족들에게 민간인 학살 문제의 해결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 습니다. 반백년 이상의 고통스런 삶을 살아온 유족들에게는 삶 주체가 투쟁이 었고, 이제 연로해진 유족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맡기는 것은 사회의 직무유기 입니다. 다행히도 민간인학살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소 명으로 생각하는 단체들이 생겨나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하면서 지역 내의 유족 회 활동을 지원하고 유족회와 함께 위령제 봉행 등의 행사를 치르고 있습니 다. 주로 학살 지역에 근거를 둔 이들 단체는 자기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 살을 지역문제 해결 차원에서 접근하는 동시에 다른 지역 또는 전국 단체들과 함께 공동 활동도 펼치고 있습니다. 지난 2002년 이들 단체가 모여 '민간인학 살 진상규명 전국사회단체협의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습니 다.

 

67. 학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선 단체가 많이 있나요?

전국적으로 30여 개 단 체가 각 지역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지역 차원에서 단체들을 규합하 여 대책위 등 연대체를 구성, 활동하기도 합니다. 이들 단체는 유족들과 함께 지역 사건에 대해 자체 조사를 실시하고 민간보고서를 발행하며 대국민 선전 에 힘써 왔습니다. 또 지방의회와 국회, 청와대에 진정, 청원 등을 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시군의회나 도의회에서 특위를 구성해내 '조사보고서'를 내는 등 의 성과를 올리기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자체로부터 실태조사 및 위령사 업 예산을 지원받는 곳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전국 단체들 중에도 문제 해결 에 함께 하는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68.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는 그동 안 주로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는 전국유족협의회와 전국사회단체협의회, 그리 고 관련 연구자와 시민 등 후원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학살규명범국민위 는 2000년 9월 7일 발족한 이래 지역단체, 유족들과 함께 전국의 학살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모아 전국 학살지도 및 학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영상 선전물, 선전 책자를 제작하여 대국민 선전 활동을 펼쳐왔습니 다. 또 민간인학살 문제를 사회의 주요 의제로 만들기 위해 '전쟁과 인권 심포 지엄', '피학살자 유족 증언대회', '합동위령제' 등의 사업을 펼쳐왔고, 국가 가 책임 있게 이 문제의 해결에 나설 것을 촉구하며 전국의 유족들과 함께 장 기 농성투쟁을 전개하고 법안 토론회 및 공청회를 수 차례 여는 등, 전국 통합 특별법 제정 사업을 줄기차게 전개해 왔습니다.

 

69. 조사보고서를 낸 지방의회는 많이 있나요?

1994년 전북도의회에 서 처음 지역 조사보고서를 낸 이후로 거창군의회, 경기도의회, 경북도의회, 경산시의회, 산청군의회, 익산시의회, 함평군의회, 화순군의회 등에서 지역민 들이 제기한 학살 피해를 조사하여 조사보고서를 냈습니다. 지방의회에서는 자 체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현장을 방문하고 유족 및 목격자의 증언을 채록하 여 조사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지방의회에서 사건을 확인한 뒤 일부 지역에서 는 지역 위령제 등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어 한계가 있습니다. 일부 지방의회에서는 국회에 입법 촉구문을 채택, 전달하거나 입법 청원을 하 기도 했습니다.

 

70.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지요?

국방부에서는 1999년 노근리 학살이 내외신에 대서특필된 후 자체 해원사업으로 전국의 학살사건을 접수받은 적이 있지만 '증거가 명확한 사건에 한해서만 개별법 제정'이라는 입 장을 고수하면서 사실상 사건을 은폐, 축소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정부에서도 미국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노근리 사건 해결 후 순차적으로'라는 입장만 내놓 고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2000년 이후 거창, 제주 4.3 사건에 대해 서만 개별 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정치적 미봉으로 일관해왔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학살규명범국민위와 유족들의 강도 높은 농성 투쟁중 정부와 행자부, 국방부 등 각 부처에서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통합특별법 제정의 기운이 높아졌으나 한나라당의 반대로 끝내 입법이 좌절되었는데, 이번 17대 국회에 들어서서 대통령이 2004년 8.15 경축사를 통해 '포괄적 과거청산' 의지를 밝힘 에 따라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등 과거청산을 위한 입법이 다시 힘을 얻게 되었 습니다.

 

71. 혹시 민간인학살 죄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한 적은 없나요?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1951년 2월 719명의 주민을 학살한 거창 신원면 사건의 경우, 전쟁중인 1951년 12월 16일 대구고등법원 중앙고등군법회 의에서 주민들을 즉결처분하도록 명령한 명령권자와 그 명령을 수행한 자에 대 해 인권을 유린한 죄를 적용하여 법적 조치를 취한 적이 있습니다. 9연대장 오 익경 대령에게는 무기징역(구형 사형), 3대대장 한동석 소령 징역 10년(구형 사형),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징역 3년(구형 징역 7년) 등 관련 군지휘관 에게 실형이 확정되었는데, 이들이 모두 1년 만에 석방된 뒤 경찰 고위간부 등 으로 재기용되어 많은 의혹을 남겼습니다. 이밖에 1950년 7-8월에 일어난 경 남 진영 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경우 당시 김병희 진영지서장이 강성갑 목사 학 살에 대한 미국 선교단체의 항의로 총살에 처해진 기록이 있긴 하지만, 그 많 은 민간인학살의 책임을 물어 처벌한 예는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 다.

 

72. 정부 부처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을까요? 증언자는 지금 이 순간도 하나 둘 죽 어가고 있는데...

국민보도연맹의 경우 가입원서를 작성했고 명부를 만들어 관리했기 때문에 관련 문서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국방부의 작전일지나 작전명령서, 법무부의 재조사 처 리 및 현황 관련 자료 등도 남아 있을 테고, 정부기록보존소를 뒤진다면 그밖 의 다른 관련 자료들도 발견될 것입니다. 다만, 1980년대 초에 당시 내무부에 서 국민보도연맹 관련 자료를 모은 적이 있는데 이들 자료가 이후 어떻게 처리 되었는지 확인되지 않는 등에 비추어볼 때 자료 수집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 입니다. 게다가 민간에서 이들 자료에 접근하기는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국가 기관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또 한, 만일 문서자료가 없다 하더라도 피해자, 목격자, 관련자의 교차 증언으로 사실을 인정하는 등, 구술 자료의 법적 효력을 인정하는 문제도 적극 검토돼 야 합니다. 증언자가 지금 이 순간도 하나 둘 죽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 이들 의 증언을 한시 바삐, 폭넓게 확보하는 것은 그 끔찍했던 학살의 진상을 밝히 는 데 필수적입니다.

 

73. 미군 문서를 통해 노근리 사건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미국측 문서를 찾는 일 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미군 작전일지나 일 일, 주간보고서 등의 문서자료 중 기밀해제된 자료에서 증거를 찾아낸다면 민 간인학살의 진상규명은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다만, 미국을 찾아가 그 산더 미 같은 자료 중에서 관련 증거를 찾아내는 것은 엄청난 인력과 경비를 필요 로 하는 일입니다. 이는 강력한 조사권한이 있는 국가기구에서 필요한 만큼의 인력과 비용을 투입하고 또 국가 차원에서 미국에 자료 협력을 얻어내야만 가 능한 일입니다. 또한 한국전쟁은 국제전의 성격도 띠고 있기 때문에 북측의 자 료, 중국, 일본 등 관련 국가의 자료도 확인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조사기구와 조사권한이 필요합니다.

 

74. 여러 사건 중에 제주 4.3사건은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이 유족들에 게 사과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부분적으로라도 해결된 사례가 많 이 있나요?

100만의 피해자를 낸 민간인학살 중 정부 차원에서 조치가 이루어진 사건은 거창 신원면 사건, 제 주 4.3사건, 노근리 사건, 이렇게 단 3건뿐입니다. 이중 거창 사건은 진상조 사 없이 명예회복법을 제정하여 위령사업을 진행한 경우고, 제주 4.3사건은 진 상조사기구를 구성하여 조사보고서를 채택하고 대통령이 사과를 하는 등의 성 과는 있었지만 조사기구의 권한이 작았고 또 관련집단의 집요한 문제제기 등으 로 말미암아 진상규명이 미흡했다는 평가입니다. 그리고 노근리 사건은 한미합 동조사 후 보고서를 발간하고 클린턴 미 대통령이 유감의 뜻은 표했지만 사건 의 진실을 밝혀내진 못했고 후속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습니 다.

 

75. 현재 법이 제정되지 않아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어려움이 있는 많은 사건들 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 인학살은 특정 지역, 특정 시기의 사건을 밝혀내는 것만으로는 그 진상을 제대 로 파악하기 힘듭니다. 전국적이고 종합적인 진상조사를 통해서만 진실에 접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살규명범국민위와 유족들은 사건별 입법에서 방향 을 전환하여 전국통합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해왔습니다. 물론 입법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의 뒷받침 없이 문제를 푸는 데는 한계가 명백한 현실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법제정은 그 일차적 과제였습니다. 통합법 은 지난 16대 국회에서 행자위, 법사위를 모두 통과하고 2004년 3월 2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으나 몇몇 우익단체와 당시 다수당이던 한나라당의 반대로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통합특별법의 목적이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자는 것 이고 또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며 이런 비극을 막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임에도 우익단체는 통합특별법을 '나라 흔드는 법'으로 매도했고 한나라당 이 이에 동조하여 유족들의 가슴에 또 한번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유족과 사회단체들은 17대 국회가 구성되자마자 다시 법안을 제출하고 입법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8편 : 해외사례- 에서 계속)

 


1호 법 쟁취 농성 투쟁 돌입 (2004/11/3)

2호 340명 인권활동가, 과거청산 법 제정 촉구 선언 (2004/11/4)

3호 어찌 잊겠는가 그 속에서 스 러진 영령들이여, 합동위령제 엄수 (2004/11/8)

4호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 민위원회 공식 발족 (2004/11/9)

5호 과거청산법 국민 절반 이상 지지 (2004/11/12)

6호 한나라당 과거사진상규명법 에 대한 흑색선전 중단하라 (2004/11/16)

7호 과거청산법 포함 입법청원 (2004/11/17)

8호 경찰 과거사진상규명위 발족 (2004/11/19)

9호 과거사 진상규명으로 민주개혁 실현하라 (2004/11/22)


1편 : 이땅에서 해원하지 못한 억울한 죽 음들 (보러가기)

2편 : 온 국민이 잠재적인 적! 국가가 국 민을 선별하다 (보러가기)

3편 : 불안정한 해방정국에서 학살은 이 미 시작되었다 (보러가기)

4편 : 학살은 의심할 바 없는 최상층의 지시 (보러가기)

5편 : 흰 옷 입은 사람은 무조건 죽여라 (보러가기)

6편 : 작전지역 내 모든 인간은 죽여도 좋다 (보러가기)

 

* 5편까지의 링크 에 문제가 발생하여 수정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학살규명 범국민위 사무처(이춘열 019-265-5694, 02-773-5158)로 문의바랍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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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는 학살의 진실을 세상에 널리 알려 사회적 공론화와 입법 을 통한 문제해결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또 학살의 진상을 밝혀 다음세 대를 위한 교훈으로 삼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사회의 인권과 민주주의의 잣대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살 아남은 우리들이 해야할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여려분의 참여와 후원은 폭력과 억 압의 시대를 넘어 인권과 평화의 시대로 가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100만 피 학살 원혼들이 해원하고 유족들이 위로받을 수 있도록 은폐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동참해주십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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