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공지사항

 
360번 : 6.25남침 이래 공산당이 저지른 만행은 어떤 글이나 말로도 표현할수 없을정도...
글쓴이: 보아 등록: 2002-08-08 15:52:21 조회: 3014
6.25남침 이래 공산당이 저지른 만행은 어떤 글이나 말로도 표현할수 없을정
도...


여중생 사망과 노근리 희생자를 애도한다면서 어째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른척하는가 ? 
눈물을 사람 골라가면서 흘리는가 ? 

"노근리에서 미군이 양민을 대량 학살했다"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떠돌았
다.    

어떤 좌익교수 말마따나 6.25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을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유감의 뜻까지 표했다.    

이에대해 일부 한국인은 미국대통령이 "사과"를 하고 미국정부가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식으로 말하면 미국은 일본에게, 일본은 미국에게, 미국·영국·프랑스는 
독일·이탈리아에게, 독일·이탈리아는 미국·영국·프랑스에게 각각 사과하
고 "민간인 피해보상"을 해야 될것이다.    

이런 어불성설을 한국의 좌익들은 배짱좋게 내놓고 떠들어 대고 있다.    

또 어떤 TV는 공산당원에서 대한민국에 충성하겠다고 전향했던 "보도연맹
원"을 6.25가 나자 학살했다고 방영했다. 보도연맹원 상당수가 대한민국으로 
전향하는 척 했다가 북한군이 들어오니까 앞장서 반공인사들을 색출하는등 이
중간첩활동을 하는걸 보고 위협을 느끼며 남한의 군·경들이 보복을 한것인데
도 그 TV는 마치 북한군이나 그 앞잡이인 보도연맹은 양민이고, 국군·경찰만
이 만행을 한것같이 부각시켰다.    

그렇다면 6.25당시 전국도처에서 북한군에 의해 계획적, 의도적으로 학살된 사
람들에 대해선 누가 사과를 하고 어느나라 정부가 피해보상을 해야 하는
가?    

북한군은 서울, 평양, 대전, 함흥등 대도시는 말할것도 없고 전국 방방곡곡에
서 저희들을 반대했다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마구 쏴죽이고 찔러죽
였다. 잘산다는 이유, 지주라는 이유, 지식인, 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
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당의 총을 맞거나, 창으로 찔리거나, 몽둥이로 
맞거나, 모진고문으로 죽어갔는가?    

그 원혼들의 한은 6.25때 "나이 어려서 전쟁도발 책임이 없다"는 김정일이 풀
어줄것인가? 아니면 그많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도 제명에 죽은 김일성을 
지옥까지 찾아가 사과를 받을것인가?    

적색분자들은 북한군의 6.25남침당시 마치 미군만이 양민을 학살한것처럼 선동
선전하고 있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도, 1948년 4월 제주도에서도 마치 경
찰 또는 국군만이 양민을 대량학살한것처럼 떠들어대다가 급기야는 폭동을 일
으킨 자들까지도 "민주화투쟁희생자"로 둔갑시키는 법까지 만들기에 이르렀
다.    

백보를 양보해 미군이 노근리에서 양민을 분간못하고 사실했다고 치자...    

불법 남침하는 인민군이 피난민 복장으로 피난민 대열에 섞여 미군에게 총격
을 가하는대도 미군은 그 총에 맞아죽어야만 했나? 그리고 피난민을 악용한 인
민군의 비열하고 치사한 원죄는 따지지 않아도 되는가?    

미군의 한국전 참전을 "외세개입"이라고 말하는것은 멋대로 사람을 죽이는 빨
갱이가 아니고는 말할수가 없다.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킨 공산 게릴라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국군이 과잉진압
하다가 무고한 양민을 많이 죽였다고 하자...    

그러나 이것은 "생각이 다르다"는 단하나의 이유만으로 마을을 샅샅이 뒤져 사
람들을 잡아죽인 북한군의 만행과는 비교가 안된다.    

또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교도소에 가두어두었던 수많은 청년들을 집단학살한 
인간이하의 만행에 비하면 그것은 약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익들은 지금 제세상을 만난듯 미군들의 실수를 침소봉
대, 확대재생산 함으로써 반미감정을 부추기는데 눈알이 싯벌개져 있다.    

    
(실수아닌 의도적·계획적 대량살상)    

6.25남침 이래 공산당이 저지른 만행은 어떤 글이나 말로도 표현할수 없을정도
로, 상상을 초월한 잔인성과 비인간성을 드러내놓고 있다.    

무수한 양민들을 도처에서 무참히 죽인것은 물론, 무기를 든 전투원들의 살상
행위도 공산당특유의 무자비성을 노정시키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경기도 개성시 북방 송악산 기슭에 설치된 국군 제
1사단 헌병대 최전방 검문소 앞으로 인민군 탱크부대가 남하하고 있었다.    

검문소를 지키던 헌병 4명은 못보던 탱크였지만 혹시나하고 거총한 자세로 정
지신호를 보냈다.    

이럴때 정상적이며 정정당당한 전투행위라면 압도적으로 우세한 무장을 갖춘 
북한군은 소총으로 무장된 국군헌병 4명을 향해 투항을 권고해야 할것이다. 이
에 불응하면 사살할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군은 탱크로 국군헌병 4명을 그대로 깔아뭉개버리고 말았다. 처참
하게 죽은 이 헌병 4명은 아마도 6·25남침 개시후 최초의 국군희생자였을지 
모른다.    

이처럼 인간이기를 포기한 북한군의 잔인성은 그후 도처에서 표출됐다.    

남침개시 사흘만인 6월 28일 오전 10시쯤 서울 중구 을지로6가 18번지(현 흥인
시장)근처에서 낙오된 국군병사 수명과 장교2명이 무장을 풀고 투항하려는것
을 다발총으로 쏴죽였다.    

그후 도처에서 승전보를 울린 북한군은 "보도연맹원"의 제보로 색출한 부자, 
지식인, 종교인, 경찰관, 낙오병, 공무원, 교사등등 서울시내에서만도 1천여명
은 총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국군이나 미군이 작전수행상 실수로, 또는 무장폭동진압과정에서 과잉방
어로 살상한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도적, 계획적 대량살인행위였다.    


(대전형무소 피학살자만도 3,119명)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가 저 악명높은 대전형무소 대량학살이다.    

1950년 9월20일 당시...인민군과 내무서에 의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양민
은 3천여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경찰관을 비롯하여 교사, 학생, 공
무원, 농업종사자 심지어는 이발사, 운전기사등 저들의 증오의 대상일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재 "반공애국지사유족회"가 파악하고 있는 피학살자는 모두 3천1백19명...수
감됐던 사람 거의전원이 희생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알려진 생존자는 단 한명,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6·25당
시 충남 보령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이갑산(78)씨다.    

이씨가 월간조선 2000년 6월호에서 밝힌 죽음 일보직전의 상황을 여기 다시 재
생해본다.    

    
(2백명씩 묶어놓고 사살, 고랑에 쳐넣어...)    

"내가 끌려나가기 며칠전부터 밤마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어요. 고문하
는 줄 알았지 그것이 죽음의 비명일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우리 감방 사람
들도 한명씩 불려 나갔습니다. 내차례가 되어 나갔더니 철사로 두손을 묶고는 
형무소 뒷쪽으로 끌고 가는거예요. 앞서 끌려간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방이 
깜깜했어요. 문이라고 짐작되는 곳을 지내는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체가 즐비한 밭고랑 사이에 누워있는 겁니다. 머리와 허벅
지가 굉장이 아팠어요. 뭘로 맞았는지 모르지만 뒤통수가 쑥 들어갔고, 칼로 
찔린 허벅지에는 피가 응고돼 있었습니다.내가 꿈틀대니까 내주위에서 시체를 
뒤적이던 사람들이 철사줄을 풀어주었습니다. 그길로 엉금엉금 기어서 형무소
옆 논에 고인물을 먹고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피로 물든 팬티 하나 걸치고 논두렁에 쓰러져 있는겁니다. 
인민군이 도망갔다는 얘기를 듣고 옷을 구하기 위해 형무소로 들어갔습니다. 
감방은 텅 비었고 우물엔 돌멩이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6사(舍)1호의 옷보
관 창고에서 헌옷을 꺼내입고 대전형무소를 떠났습니다..."    

이씨 이외의 나머지 3천여명(당시 유엔군사령관은 5천여명으로 추정)은 어떻
게 학살됐나? 그 진상의 일단을 1953년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마크 W. 클라크장
군이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살펴본다.    

"1950년 9월 20일, 드디어 운명의 날은 다가왔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백명 내
지 2백명 정도로 구성된 (대전형무소) 수감자 수개반을 야간을 이용, 교묘하
게 감방에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손을 등뒤로 묶고 다음에는 그들을 
연쇄적으로 이어서 결박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묶인 상태로 미리 예정된 학
살장소에 수송됐습니다. 그들은 이미 패여있는 길다란 고랑에 쳐놓고 사정없
이 사살했습니다...공산주의자들은 생존자가 있는가를 조사한후 발견되면 머리
를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흙을 덮어 집단매장을 했던것입니다. 이 흙은 조급하
게 덮어졌기 때문에 얇아서 피로 물든 그 자리를 즉시 판별할수가 있었습니
다..."    

    
(구덩이가 시체로 넘치자 교회서 학살...)    

"1950년 9월26일에 이르자 이 악귀같은 공산당 내무서원들은 철수 이전에 학살
을 끝내기 위해 더욱 서둘렀습니다. 내무서 구내에도 구덩이를 파고 북한군의 
지원까지 받아서 피비린내 나는 살륙을 계속했습니다. 걸을수 있는 군인포로
는 몇사람씩 끌어내어 즉시 죽여버렸고, 부상한 수명의 미군포로들은 들것에 
실어 구덩이로 끌고가서 사살 또는 때려 죽였습니다. 시간에 쫓기자 공산경찰
인 내무서원들은 아직 처치하지 못한 반공인사들을 이미 시체로 꽉찬 구덩이
에 끌고가서 그위에 계속 쓸어넣고 죽였습니다. 천주교 교회내에 수감했던 사
람들도 미친개처럼 서둘러 학살했습니다..."    

"구덩이가 시체로 넘치자 나머지 수감인들은 교회의 구내나 지하실에서 학살 
했습니다. 우물속으로 던져버린 시체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몸서리 
나는 학살극을 끝낸 공산 악귀들은 도주하여 버린것입니다..."    

    
(두개의 큰 우물에 퉁퉁불은 시체가 꽉차...)    

"시체를 검시(檢屍)하여보니 대다수가 학살되기 전에 구타당하여 몸이 성한데
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수천명의 희생자들 가운데에 생존자는 일반 민간인 
3명, 한국군 병사 1명, 미국인 2명을 합해 불과 6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수천의 시체들은 모두 발굴되었습니다...."    

이어 클라크장군의 다음과 같은 맺음말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고 한국민을 
한층더 부끄럽게 하는 구절이었다.    

"전대미문의 이 학살극은 바로 한국민의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요!"    

그러면 공산당의 비인간적 대량학살의 태풍이 스쳐간 직후 현장에 달려간 몇
몇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자. 1950년 10월 3일 유엔군이 대전을 탈환한 직후 대
전형무소로 복귀령을 받고 선발대로 달려간 이준영(78)전교도관...그는 당시
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형무소 취사장 옆에 있는 직경 1m짜리와 2m짜리 두개의 큰 우물에 퉁퉁 불은 
시체가 꽉 차 있었습니다. 우물위로 사람의 머리가 삐죽삐죽 나와있는데 모두 
썩어가고 있었죠. 시체 썩는 냄새에 오장육부를 다 토해낼 지경이었습니다. 10
여명 이상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우물속에다 집어넣고 기어나오지 못하게끔 사
람과 사람 사이에 벽돌과 기왓장을 함께 넣었습니다..."    

"그 위에다 또 수십명의 사람을 쳐넣어, 마치 단무지 담그는 방식으로 사람들
을 차곡차곡 포개서 생수장 시켜 놓았습니다. 한 우물속에서 끄집어 낸 시신
이 1백구가 넘었습니다..."    

이씨의 증언은 계속 이어진다.    

"형무소 구내를 한바퀴 돌아보니 취사장 옆의 우물 두군데와 농사를 짓기위해 
설치한 온상속에 시체가 집단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온상에는 길이 60m 가량
의 고랑이 양쪽으로 두개가 있었습니다. 양쪽 고랑에 각각 두줄로 시체가 포개
어져 있었습니다. 어림잡아 2백구가 넘었습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은, 그러나 가족·친지이외에, 대한민국의 그 누
구도 그 죽음을 알아주거나 보상해주려는 사람이 없다.    

침묵속에 44년을 지내던 희생자 가족들은 1994년에야 "반공애국지사유족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그후 해마다 현충일이면 추모제를 갖는 한편, 정부에 대해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촉구해 왔으나 문민정부도, 국민
의 정부도 줄곧 외면해 오고 있다.    


(이름모를 자유전사 9백여명의 사연...)    

대전형무소의 대학살극이 전개되고 있던 바로 그 싯점, 서울의 곳곳에서도 비
슷한 학살극이 황급히 도주하는 북한군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알려진 가장큰 규모의 학살은 서울 종로4가에 있던 옛동대문경찰서
를 3개월간 점령했던 내무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1950년 9월28일 오후 유엔군이 남산쪽에서 청계천4가를 거쳐 돈암동 방
면으로 진격하기 직전 내무서 안에 강제구금했던 양민 약80명을 밧줄로 묶어 
종로4가 네거리 한구텅이로 끌고갔다.    

이윽고 다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네거리 구덩이 마다에는 깊이 
2~3m의 큰 웅덩이가 파여있었다. 방공호로 팠던것이었다.    

총을 맞아 쓸어진 사람들은 이 구덩이속으로 줄줄이 고꾸라졌다.    

북한군들이 사라진지 한시간쯤이었을까...오후3시쯤 아마도 정찰목적인듯 헬리
콥터 한대가 종로4가 상공을 선회하더니, 다시 한시간이 지난 4시쯤에야 꿈에
도 그리던 국군과 미군이 남산쪽에서 진입해 들어왔다.    

이들은 불과 2~3시간전에 학살된 양민들이 길가 구덩이속에서 꿈틀거리거나 신
음하는걸 보고 구출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앰불런스가 몇대 달려왔다고 한
다.    

그후 앰뷸런스는 돈암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또와서 환자 는 시체들을 싣고 갔
다. 후에 알고보니 앰뷸런스들은 원남동의 서울대학병원으로 환자와 시체들을 
운반했다는 것이다.    

이 서울대학병원 또한 비극을 겪은 현장이기도 했다. 지금도 서울대학병원에
는 학살된 양민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서울대학병원의 참극)    

창경궁 맞은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르는 길 초입에 장례식장
이 있다. 그 뒤 언덕위에 비석은 서있다. 그 꼭대기에 검은 까마귀 한마리가 
외로이 앉아있다. 마치 그날 그 까마귀의 몇대조 할아버지(할머니)가 훨훨 날
아다니며 시체들을 파헤친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50년 6월 25일...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 파죽지세
로 남하하여 수도서울의 최후방어선인 미아리 고개마저 돌파하고 창경궁 앞까
지 다다르게 되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거의 1천여명에 달
하는 부상장병들로 응급실, 입원실, 수술실은 물론, 병원 복도까지 가득차게 
되었다.    

이때 병원은 국군1개 경비소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병원내 의사와 간호원들은 
서울함락이 목전에 임박했음에도 환자를 두고 떠날수 없다며 피난도 잊은채 오
직 환자치료에만 전념했다.    

6월 28일 새벽, 국군 경비소대가 병원주위를 철통같이 방어하여 완강히 저항하
자 북한군은 1개대대 병력을 투입했다. 경비소대는 이곳 뒷산(당시 이곳은 조
그만 동산이었다)에서 인민군 1개대대를 맞아 결사항전 했으나 모두 전사했
다.    

이곳 동산이 함락되자 북한군은 병원에 난입하여 입원한 국군 부상장병과 일반
환자 그리고 가족을 포함하여 9백명 이상을 산채로 구덩이에 묻거나 불에 태
워 죽이고, 총을 난사하여 무자비하게 학살하는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
다.    

북한군은 3개월간 수도서울을 비롯한 남한 곳곳을 유린하며 돌아다니다가 유엔
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또다시 곳곳에서 무자비한 비전투원 
살상을 자행했다.    

경기도 고양군과 파주군 일대에서 광란의 집단살인극을 벌인것도 그중의 한 예
이다.    


(팔다리 자르고 입찢고 창으로 찔러...)    

16세의 중학생에서 대학생,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38도선에서 가장 가까운 고양
시, 파주군 일대의 청소년 수백명은 북한군들의 남침이 시작되자 태극단원을 
조직하여 지하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서울수복 약1주일전인 9월20일, 고양군과 파주군을 장악하고 있던 북한군들은 
좌익분자 30여명을 앞세워 태극단원들을 색출하여 모두 학살했다.    

그중에서도 조직부장 홍원식(20·일산)과 핵심단원 윤석만(21·청석)은 팔과 
다리를 자른다음 창으로 찌르고 입을 찢어 살해했다.또 산남의 이응만(33)가 
도주하다가 다시 붙잡히자 얼굴 두점·엉덩이살 두점을 도려내고 다리까지 잘
라 죽였다. 금촌에서는 15~16세의 어린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오늘날 남한 좌익들의 움직임...)    

남한 내부의 좌익들은 이런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 관심도 없다. 입도 뻥긋하
지 않는다.    

여중생 2명이 미군의 과실치사로 죽자 신이나서 여기저기서 반미감정을 선동질
하고 고의적인 살인으로 몰고 미군철수를 외치고 있다.    

우리는 북한군의 6.25남침당시 붙잡혀 죽은 진짜 양민들의 원혼을 잊을수가 없
다.    

더욱이 그 만행을 50년이상 지난 오늘날 적반하장으로 뒤집어씌우는 좌익들의 
발호를 더이상 묵과좌시 할 수 없다. 50년이 아니라 1백년, 1천년이 지나도 밝
혀야 한다. 진실을...    

남한의 좌익들은 50년전의 죄업을 덮기위해 사실을 은폐하고 죄를 뒤집을뿐만 
아니라, 아직도 북한에서 반대자를 색출하여 무자비하게 무더기로 공개처형하
고 있는 상전들의 만행도 은폐하려 하고있다.    

우리가 이런 내적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어제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시 되
풀이하게 될 것이다.    
    




쌀 30만톤 대북지원에 6·25납북자 8만여명의 생사확인을 조건으로 제시하라! 

비전향 장기수들의 인권은 소중하고 강제로 피납된 대한민국 국민인 저희 부모
와 아들딸들의 인권은 소중하지 않습니까?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북한의 식량사정에 견주어 쌀 30만톤을 아무런 조건없
이 지원하겠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서해도발로 순국장병들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은 
커녕 기만적인 유감표명에 기다렸다는 듯이, 파산선고를 맞은 햇볕정책의 마지
막 발악인양 국민의 혈세를 또다시 김정일 정권에게 상납하고자 하는 작태앞
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북한 김정일 정권에 의해 강제납북된 인사들이, 대한민국 정부 공보처 통계국
이 1952년에 작성한 6·25사변피납치자명부가 가족들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나왔지만, 지금까지 국민의 정부는 이의 존재까지도 부인하였으며, 이에 대한 
아무런 후속조치를 내놓지 뭇하고 있는 실정에서, 우리의 가족을 북한 김정일 
정권의 인질로 남겨놓은 채 아무런 조건없이 30만톤의 쌀을 지원한다니, 참으
로 김대중정부는 누구의 정부이며 어떤 사고를 갖고 있는 정권이란 말인가?  


 민족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 그리고 민족공동변영을 기약하는 통일을 방해하
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북한정권에 의해 인질이 되어 오직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배제한 화해와 협력이 진정 온당하
단 말인가. 사악한 정권의 총칼에 짓눌려 가족의 행복과 개인의 인권이 철저
히 유린당하고 있는 작금의 반민족적 테러앞에서 어찌 평화와 통일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6·25전쟁당시 파납치자 명단의 존재를 극구 부인해왔고, 이들의 생
사확인과 송환을 철저히 도외시한 김대중 정권은 피땀흘린 국민의 혈세를 단 
한푼도 사용할 자격이 없는 직무유기 정권이기에, 조건없는 대북지원을 즉각 
중단할 것과 국민의 혈세를 남북정상회담이라느 정치적 쇼를 위해 제멋대로 횡
령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임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1. 정부는 조건없는 대북 쌀지원을 즉각 중단하고, 1952년 정부의 공식  문서
인 6·25사변파납치자명부를 북한 김정일 정권에게 제시함으로써, 대한민국 국
민인 8만여 납북자들의 생사확인을 조건으로 협상하라.  

2.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수많은 대북퍼주기에 대하여 서해도발로 응답한 북
한 김정일 정권의 야만적 살인행위를 목도하면서, 그동안 김대중 정권의 국민
혈세낭비 작태를 강력히 규탄한다. 

3. 온 세계의 인도적 지원을 오직 자신들의 정권유지와 국민탄압용으로만 탐식
해온 김정일 정권은, 이미 국제구호의 자격을 상실하였기에 개혁개방으로의 체
제변화를 모색하든지 아니면 멸망하라. 


   
                           2002년 7월 31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납북자가족협의회, 납북자가족모임 
                       피납·탈북인권연대  

         방문   http://www.korwarabductees.org/ 


>휴전이후 납북자 487명 명단 
>※ 납북 미귀환자 명단. 
> 
>   ▲납북 어부(436명)    -55.5.28 납북 대성호 선원 10명 : 김장현 황득식 
정태현 유외택 이산음 유장화    윤성우 김순귀 조종일 박표만 . 
> 
>   -57.11.9 납북 해룡호 선원 1명 : 김성주. 
> 
>   -57.11.9 납북 덕길호 선원 1명 : 마승섭. 
> 
>   -58.4.28 납북 명규호 선원 2명 : 박동근 홍복동. 
> 
>   -58.4.29 납북 평화호 선원 2명 : 김영복 박영근. 
> 
>   -58.4.30 납북 다복호 선원 2명 : 김창현 김명선. 
> 
>   -58.4.30 납북 풍영호 선원 1명 : 한진룡. 
> 
>   -58.4.30 납북 신흥호 선원 1명 : 박세운. 
> 
>   -58.5.14 납북 신복2호 선원 1명 : 장순종. 
> 
>   -58.11.7 납북 신명호 선원 3명 : 송성락 신광필 송상인. 
> 
>   -58.11.7 납북 금구호 선원 3명 : 박동준 허 준 이용택. 
> 
>   -58.12.6 납북 어성호 선원 2명 : 김범주 김여훈. 
> 
>   -58.12.6 납북 하영호 선원 3명 : 김명은 엄광섭 김윤택. 
> 
>   -58.12.6 납북 금능호 선원 2명 : 윤승범 김개락. 
> 
>   -58.12.6 납북 광영호 선원 1명 : 김원로. 
> 
>   -64.3.1 납북 보승2호 선원 11명 : 이종윤 송은석 최석용 최준수 고오동 
곽형주  박태길 임귀복 최동길 곽문길 곽종효. 
> 
>   -64.7.19 납북 강화호 선원 2명 : 박기정 한상준. 
> 
>   -64.7.29 납북 부영호 선원 1명 : 문성천. 
> 
>   -64.10.16 납북 신성2호 선원 2명 : 유한복 김광호. 
> 
>   -65.5.8 납북 광명호 선원 1명 : 최동기. 
> 
>   -65.5.31 납북 대영호 선원 1명 : 이정웅. 
> 
>   -65.10.29 납북 승리호 선원 2명 : 나용렬 현근화. 
> 
>   -65.10.29 납북 용복호 선원 2명 : 문정숙 김분임. 
> 
>   -65.10.29 납북 용미호 선원 1명 : 정영남. 
> 
>   -65.11.15 납북 춘곡호 선원 2명 : 정창규 천태옥. 
> 
>   -65.11.20 납북 명덕호 선원 9명 : 주인복 최영중 김성만 이병기    이창
영 김경수  김장원 김정구 한동순. 
> 
>   -65.11.20 납북 덕삼호 선원 1명 : 서봉래. 
> 
>   -65.11.26 납북 대양79호 선원 1명 : 김태윤. 
> 
>   -65.11.30 납북 행영호 선원 2명 : 서석민 김종옥. 
> 
>   -66.1.26 납북 영농호 선원 1명 : 황창섭. 
> 
>   -66.6.24 납북 대성호 선원 1명 : 박팔만. 
> 
>   -67.4.12 납북 천대11호 선원 14명 : 최명환 정학명 장영식 진정팔 최종
등 최효 길 남복이 장길룡 김상수 김영일 김홍일 이정식 김장훈 김대곤. 
> 
>   -67.5.23 납북 창성호 선원 2명 : 윤경구 홍순표. 
> 
>   -67.5.28 납북 승용호 선원 1명 : 이선일. 
> 
>   -67.5.29 납북 태영호 선원 2명 : 최창의 김옥준. 
> 
>   -67.6.5 납북 풍복호 선원 2명 : 최원모 문경식. 
> 
>   -67.6.15 납북 부성3호 선원 1명 : 김봉수. 
> 
>   -67.7.22 납북 정진호 선원 1명 : 이기출. 
> 
>   -67.11.3 납북 어성호 선원 1명 : 오원섭. 
> 
>   -67.11.3 납북 거성호 선원 1명 : 이진영. 
> 
>   -67.11.3 납북 금윤호 선원 6명 : 김자준 박규채 박낙선 이태수 장재천 이
창식. 
> 
>   -67.11.3 납북 해양호 선원 5명 : 김성재 박능출 홍순권 마기덕 김상준 . 
> 
>   -67.12.20 납북 청진호 선원 6명 : 김남현 이정해 김성호 이춘식 오명복 
가양덕. 
> 
>   -67.12.25 납북 광명호 선원 1명 : 한해진. 
> 
>   -68.1.6 납북 경호 선원 1명 : 김주철. 
> 
>   -68.1.6 납북 홍익호 선원 1명 : 양상을. 
> 
>   -68.1.11 납북 행덕호 선원 1명 : 박복택. 
> 
>   -68.3.10 납북 기성호 선원 1명 : 서수중. 
> 
>   -68.4.17 납북 창영호 선원 7명 : 김학래 이태용 김흥록 이옥진 강명보 이
영석  정장백. 
> 
>   -68.4.27 납북 종진호 선원 4명 : 임규철 정연태 김룡봉 윤무출. 
> 
>   -68.5.9 납북 신진호 선원 2명 : 김정일 오성재. 
> 
>   -68.5.23 납북 대성호 선원 3명 : 김홍균 임병혁 한귀돌. 
> 
>   -68.5.29 납북 춘덕3호 선원 1명 : 김재구. 
> 
>   -68.5.29 납북 성운호 선원 5명 : 박만복 김명학 이상원 장창수 김수근. 
> 
>   -68.6.1 납북 순덕호 선원 1명 : 공문익. 
> 
>   -68.6.6 납북 부길호 선원 4명 : 김일오 김경두 박명옥 김길오. 
> 
>   -68.6.6 납북 영신호 선원 4명 : 고주봉 오판철 김이배 최동진. 
> 
>   -68.6.6 납북 덕산호 선원 5명 : 이선주 이일남 고종현 김용길 서종술. 
> 
>   -68.6.8 납북 풍년호 선원 11명 : 전인만 최동일 김병호 김영욱 신성욱 주
재근  고준수      
>   
    -68.6.12 납북 영신호 선원 2명 : 서용식 김도경.  조문호 김용기 박형중 
이운길. 
>               
>   -68.6.16 납북 해양호 선원 1명 : 김광운 . 
> 
>   -68.7.17 납북 취영호 선원 3명 : 손은주 손철순 김광근. 
> 
>   -68.6.17 납북 복성6호 선원 3명 : 홍상표 김영구 유병춘. 
> 
>   -68.6.21 납북 성북2호 선원 2명 : 심광식 김창현. 
> 
>   -68.6.23 납북 경흥호 선원 4명 : 김진경 이일환 오남문 이기준. 
> 
>   -68.6.29 납북 경북호 선원 3명 : 차종석 김태만 이상은. 
> 
>   -68.7.2 납북 금융호 선원 9명 : 김용수 윤두찬 김남호 함태천 윤능산 고
종환  김명회 주  
>                                                  영삼 이은권. 
    -68.7.2 납북 신양호 선원 5명 : 황두호 장 면 곽도상 김응권 박성문. 
> 
>   -68.7.2 납북 창명호 선원 6명 : 선우석 이춘만 정강열 조규영 김철규 이
종범. 
> 
>   -68.7.4 납북 백구17호 선원 2명 : 이영철 윤귀남. 
> 
>   -68.7.10 납북 태양호 선원 2명 : 조석원 김진영. 
> 
>   -68.7.10 납북 만복호 선원 5명 : 장진구 최원수 강붕운 최승복 박흥식. 
> 
>   -68.7.10 납북 가덕호 선원 4명 : 전석구 이해준 박종업 김상윤. 
> 
>   -68.7.12 납북 덕성호 선원 4명 : 김남국 이양진 김춘식 여인억. 
> 
>   -68.8.6 납북 대복1호 선원 3명 : 김재욱 황명삼 한택선. 
> 
>   -68.8.7 납북 덕수2호 선원 6명 : 장을선 정한수 김광수 강명화 김인철 엄
기만. 
> 
>   -68.10.30 납북 용명호 선원 1명 : 함기남. 
> 
>   -68.10.30 납북 해진호 선원 1명 : 김종우. 
> 
>   -68.10.30 납북 영창호 선원 3명 : 임재동 진기봉 김이득. 
> 
>   -68.10.30 납북 어재호 선원 1명 : 전만수. 
> 
>   -68.11.7 납북 양진호 선원 2명 : 이영기 고순철. 
> 
>   -68.11.7 납북 동일호 선원 1명 : 이태운. 
> 
>   -68.11.7 납북 해승호 선원 1명 : 김동주. 
> 
>   -68.11.7 납북 준호 선원 1명 : 문원표. 
> 
>   -68.11.7 납북 원일호 선원 1명 : 이기석. 
> 
>   -68.11.8 납북 영덕호 선원 1명 : 안수선. 
> 
>   -68.11.8 납북 수진호 선원 2명 : 정연배 전도민. 
> 
>   -68.11.8 납북 풍성호 선원 1명 : 김종순. 
> 
>   -69.5.1 납북 신흥2호 선원 1명 : 한종남. 
> 
>   -69.5.5 납북 홍덕호 선원 1명 : 이광원. 
> 
>   -69.6.10 납북 순호 선원 3명 : 임판길 이동우 정홍해. 
> 
>   -69.6.10 납북 신성호 선원 4명 : 이덕표 최두수 정오석 천문석. 
> 
>   -70.4.29 납북 봉산21호 선원 5명 : 엄승영 김태랑 강병일 최종률 정영
철. 
> 
>   -70.4.29 납북 봉산22호 선원 3명 : 박휘만 이재근 황석균. 
> 
>   -70.6.22 납북 금강산호 선원 4명 : 권혁근 오관수 김홍동 이순봉. 
> 
>   -70.6.30 납북 남일7호 선원 1명 : 김일영. 
> 
>   -70.7.8 납북 만복1호 선원 1명 : 사명남. 
> 
>   -70.7.8 납북 만복2호 선원 1명 : 최상일. 
> 
>   -70.7.8 납북 무진호 선원 3명 : 민경신 변호신 장춘빈. 
> 
>   -71.1.6 납북 휘영37호 선원 12명 : 박천향 정세률 박정구 김인천 황영
식  김상대 박동순 송옥천 정목사리 김창덕 정완상 박길윤. 
> 
>   -71.5.14 납북 창동호 선원 1명 : 김재수. 
> 
>   -71.12.25 납북 해행1호 선원 3명 : 김봉식 강흥기 황영천. 
> 
>   -72.1.10 납북 동진호 선원 1명 : 김정옥 . 
> 
> 
> 
>   -72.2.4 납북 안영35호 선원 26명 : 김계홍 이평일 위춘환 김철주 김소
웅  이상록 정봉갑 정동배 박달모 전승칠 박장현 신태용 최부영 김달영   이홍
섭 박복만 공순경 김임권 김일봉 김석만 동병순 김동식 배현효  김휘남 박상
국 김두선. 
> 
>   -72.5.3 납북 금해11호 선원 1명 : 강여진. 
> 
>   -72.5.12 납북 해영2호 선원 1명 : 김순식. 
> 
>   -72.6.9 납북 유풍호 선원 9명 : 배민호 김길정 이수석 방승도 남무수 남
정렬  최성현 임창규 이원재. 
> 
>   -72.8.14 납북 금성3호 선원 2명 : 송래규 김영식. 
> 
>   -72.8.21 납북 일진6호 선원 2명 : 김대봉 이석용. 
> 
>   -72.12.28 납북 오대양61호 선원 16명 : 박두남 박영석 박용갑 이공희 김
종원  이재명 박영종 최영근 김의준 김일만 박양수 김용철 김천구 김옥률   김
태준 서석기 . 
> 
>   -72.12.28 납북 오대양62호 선원 8명 : 유경춘 서영구 강소동 정형래 박두
현  정도평 정건목 안수영. 
> 
>   -73.7.27 납북 신진1호 선원 6명 : 나기용 조순래 조인우 김영희 김순남 
서득수. 
> 
>   -74.2.15 납북 수원32호 선원 14명 : 김생림 송민경 김근식 김용기 김용
길  김월근 김종관 박경원 안병진 유용석 이대홍 이성룡 이천석 정유석. 
> 
>   -74.2.15 납북 수원33호 선원 14명 : 박종주 임태환 김재봉 김중식 김현
남    박남주 백홍선 장영환 장종윤 최복렬 최영철 고광희 기노석 김용건. 
> 
>   -75.8.8 납북 천왕호 선원 30명 : 김두익 최욱일 박상원 이해운 우재학 박
정출   우재선 최종덕 고명섭 김구영 박시동 박해영 임창웅 김찬우 이구석  윤
정숙  민기식 이상운 이기하 박종선 고남수 권종덕 윤종수 이복우 전극표  권
용만  유지용 허용호 허정수 이한석 황규오. 
> 
>   -77.5.10 납북 통영호 선원 1명 : 최장근. 
> 
>   -80.1.26 납북 해왕7호 선원 1명 : 김환용. 
> 
>   -87.1.15 납북 동진27호 선원 12명 : 김순근 김상섭 강희근 추영수 진영
오  노성호 박광현 양용식 임국재 김영현 정일남 최종석 . 
> 
>       ▲69.12.11 납북 KAL기 승무원.승객 12명 : 유병하 최석만 성경희 정
경숙 황 원  채헌덕 김봉주 장기영 임철수 이동기 최정웅 조창희. 
> 
>       ▲70.6.5 어로보호활동중 납치된 해군 방송선 I-2정 승선자 20명 : 문
석영  정수일 임성우 김기강 조태봉 도종무 맹길수 함영주 신영훈 권덕찬  김
태종 박재수 전해렬 정원석 이재영 정광모 서금성 이덕주 최웅호  조진오 . 
> 
>   ▲74.6.28 해경 863함 승선자(경찰) 2명 : 진종영 신명선. 
> 
>       ▲해외근무 또는 유학중 납북자(12명). 
> 
>   ▲71.4.5 서독에서 납북된 일가족 4명: 유성근 정순섭 유경희 유진희. 
> 
>   ▲78.4.13 노르웨이에서 납북된 교사 1명 .: 고상문. 
> 
>   ▲85.12 서독에서 납북된 오길남씨 가족 3명 .: 신숙자 오혜원 오규원. 
> 
>   ▲87.7.20 오스트리아에서 납북된 학생 1명 : 이재환. 
> 
>   ▲95.7.9 중국에서 납북된 목사 1명 : 안승운. 
> 
>   ▲99.9.17 중국에서 납북된 사업가 1명 : 장세철. 
> 
>   ▲2000.2.1 중국 옌지(延吉)에서 선교활동을 해온 목사 1명: 김동식. 
> 
>   ▲여름방학중 해안가에서 납치된 고등학생(5명). 
> 
>   ●77.8.12 홍도에서 납북 2명 : 이민교 최승민. 
> 
>   ●78.8.5 선유도에서 납북 1명 : 김영남. 
> 
>   ●78.8.10 홍도에서 납북 2명 : 이명우 홍진표 . 
>

정규표현식
[ 0.03 sec ]
| 목록보기 | 윗글 | 아랫글 | 글쓰기 | 답장쓰기 | 수정 | 삭제 |

 

 

[140-801]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48 신성빌딩 4층
TEl : 02) 774-8774   Fax : 02)774-8773  E-mail : tsmyr@jinbo.net
평등사회를위한민중의료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