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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번 : 사북노동항쟁 '늙은 광부'들 통곡하다
글쓴이: 민중의료연합 등록: 2002-11-27 15:07:57 조회: 616
사북노동항쟁 '늙은 광부'들 통곡하다  
  
    
  
  한겨레신문  
  
  
■ 늙은 광원들의 굿판 

지난 15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수원청소년문화센터 2층 은하수홀. 60줄의 
‘늙은 광부’ 두 명이 젊은 관객들 앞에 섰다. 이원갑(62)씨와 전효덕(60)씨
는 1980년 4월 발생한 이른바 ‘사북사태’ 당시의 ‘폭도’들이었다. 2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다. 이제는 ‘폭도’의 꼬리표
를 떼어달라고. 

3년여 전 젊은 다규멘터리 감독 이미영(27)씨가 이들에게 앵글을 맞추면서 시
작된 늙은 광원들의 ‘굿판’은 지난 4월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한
겨레> 4월29일치 참조)가 세상에 나오면서 본격화됐다. 정선, 태백, 부산, 광
주, 청주, 춘천, 인천, 서울 등 지난 4월부터 영화상영회가 있는 곳이면 이들
은 어김없이 쫓아와 젊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전국 각지에
서 열린 상영회는 이미 20여 차례를 넘겼다. 

“광원들은 두 개의 하늘을 이고 산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막장 속의 땅하늘이
고, 하나는 바깥 하늘 입니다. 일을 마치고 탄광 밖으로 나올 때면 정말 ‘오
늘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부마항쟁은 이미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정치적으
로 양대 후원자가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무지랭이 광원들의 뼈아픈 고
통은 역사속에 매몰된 채 난동, 폭동, 사태의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습니
다. 과거의 역사를 바로 조명해야 미래의 역사가 바로되는 것 아닙니까” 

‘사북노동항쟁’ 당시 민주노조 진영의 위원장 후보였던 이원갑씨는 낮고 굵
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관객들은 이씨의 말을 들으며 먼지처럼 희미한 과
거 속의 사북으로 한걸음씩 다가서고 있었다. 

■ 사북의 진실 

80년 4월의 사북항쟁은 광원들의 어용노조 반대투쟁이 당시 신군부로 상징되
는 공권력과 정면충돌한 사건이었다. 사태가 일단락된 뒤 신군부에게 끌려간 
광원과 부녀자 100여명은 모진 고문과 무자비한 폭행으로 철저히 짓밟혔고, 아
직도 그들은 그 후유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관객과의 대화가 끝난 뒤 자리를 옮겨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던 이원갑
씨는 대뜸 자신의 상의를 풀어헤쳐 보였다. 이씨의 왼쪽 갈비뼈 끝은 얼핏 보
아도 눈에 띨 정도로 볼록 삐져나와 있었다. 명치뼈를 만져보니 뼈끝이 한쪽으
로 휘어져 있다. 이씨는 80년 5월 붙잡혀간 뒤 보안대 요원의 군화발에 차여 
이렇게 됐다고 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가 차려진 강원도 정선경찰서는 1.5평 규모로 간이 칸막이
를 설치한 방들이 여럿 있었다. 보안대 요원들이 이 방들을 돌며 ‘순회 고
문’을 하는 식이었다. 고춧가루 물고문, 고무호스 구타, 손가락에 연필꽂기, 
무릎 사이에 각목 끼우고 짓밟기, 군화발로 걷어차기 등 고문 방식은 다양했
다. 이씨는 하루에 서너차례 물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당시 연행자 중에는 요
즘도 물고문 악몽 때문에 물이 가득 담긴 접시를 보면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
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전효덕씨는 고춧가루 물고문 끝에 이북을 갔다왔다고 
했다가 나중에 “이북을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른다”고 부인하면 두들겨 맞는 
일을 반복했다. 

여성들에 대한 ‘성고문’도 자행됐다. 노금옥씨는 영화에서 “수사관들이 여
자들을 홀딱 벗겨놓고 젖꼭지를 세게 잡아당겨 비틀고, 겨드랑이 털은 물론 음
모까지 뽑았다”고 증언했다. 일각에서는 부천서 성고문사건과 같은 심각한 성
고문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물증은 없다. 이미영 감
독은 “상당수 여성들이 가정불화 등을 우려해 이 문제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
다”고 설명했다. 

■ ‘사북’ 명예회복 되나 

전효덕씨는 기자에게 “사북, 이거 명예회복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명예회
복이 가능할 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장사하다보면 파출소 
갈 일도 가끔 있는데 그 때마다 경찰들이 ‘사북사태’ 관련자인 줄 알고나면 
별 것 아닌 것도 뜸들이고, 마치 위험인물인양 ‘쌍눈’을 뜨는 것이 못마땅하
다고 했다. 

지난 8월 사북항쟁 관련자 20여명은 국회 앞에서 진행되던 의문사진상규명법
과 민주화운동명예회복법 개정촉구 농성에 합류했다. ‘사북’ 이후 22년만의 
농성이었다. 민주화운동명예회복법에 따라 관련자 4명이 명예회복을 신청했지
만 심의도 이뤄지지 전에 그 시효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법 개정을 통해 사
북 관련자들에 대한 심의가 다시 이뤄져 법적으로나마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
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8월의 농성은 일주일만에 끝냈다. 대부분이 하루
하루 살아가기 바쁜 ‘노가다’들인 탓이었다. 

이원갑씨는 이른바 항쟁 당시 발생한 ‘노조지부장 부인 집단린치 사건’에 대
해서도 매듭을 지을 것을 주장했다. ‘린치사건’은 항쟁 와중에 어용으로 지
목된 노조지부장이 도망가자 흥분한 광원들과 부녀자들이 그 부인에게 린치를 
가한 사건이다. 이씨는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6000여명의 광원들과 그 가족
들의 대부분은 옳은 뜻으로 투쟁했지만 다소 옳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며 
“지부장 부인도 민주화 과정의 희생자인 만큼 응분의 보상과 명예회복이 있어
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광원들은 힘이 없어 그 소리는 허공에 사라지
고, 이제 폐광되는 탄광 막장에 우리 이름도 그대로 묻혀 사라질 형편”이라
며 “오랜 세월 동안 고통받은 광원들의 아픈 상처를 누가 어루만져줄 것이
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북항쟁 어땠나 


1980년 4월 발생한 사북항쟁은 70년대 수출경제의 그늘 아래 신음해오던 노동
자와 민중의 집단적 분노의 표출이었다. “노동자도 사람”이라고 외친 전태일
의 분신이 70년대를 열었다면, 사북항쟁은 80년대 벽두 탄광민중이 지역장악이
라는 투쟁형태로 한국 자본주의에 대항한 것이었다. 

역사학연구소 김무용씨는 사북항쟁의 전개과정을 대략 3단계로 나누고 있다. 1
단계는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반대투쟁을 중심으로 광원들이 결집해가는 시기
로, 대략 80년 3월 어용노조가 회사쪽과 몰래 임금인상안을 합의하기까지의 과
정이다. 2단계는 어용노조 집행부에 대한 광원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시기로, 
어용노조 퇴진을 위한 조합원 총회 개최를 둘러싸고 노조원들은 경찰과 직접 
충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경찰 지프가 광원들을 치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
했다. 3단계는 4월22일 광원과 그 가족들이 이른바 ‘안경다리 투석전’ 끝에 
경찰을 몰아내고 사북일대를 장악한 뒤 24일 협상으로 항쟁이 종결되는 과정이
다. 이 시기 광원들의 분노는 급격히 폭발해 투석전 와중에 경찰 1명이 돌에 
맞아 사망하고, 노조지부장 부인에 대한 린치사건이 발생한다. 

사북항쟁은 정치적으로는 80년 정권장악에 나선 신군부에 저항하는 중요한 출
발점이 됐고, 노동운동 차원에서는 80년대 초 전투적이고 폭력적인 한국 노동
운동의 시발이 됐다. 또 사북항쟁은 단순한 노동자 투쟁이 아니라 파업투쟁 와
중에 노동자 가족까지 참여하는 항쟁의 형태로 전개된 것도 한 특징이다. 

백기철 기자 kcbaek at hani.co.kr 

  
 
  
   백기철
 
   
  02-11-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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