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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6 호 - 200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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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문제로 불거진 한미투자협정
1998년 7월 27일 당시 외교통상부 한덕수 통상산업본부장은 "영화산업은 규제보다는 지원을 통해 육성해야 할 대상"이라며 스크린쿼터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외환위기 극복책의 하나로 제안된 한미투자협정 체결을 위해 미국이 스크린쿼터 폐지를 요구한 것,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 영화계는 스크린쿼터사수를 위해 뭉쳤고 농성에 돌입하면서 시민사회단체와 문화단체, 해외의 연대와 지지까지 얻어냈다.
그러나 일단락되었던 스크린쿼터 유지결정은 지금까지 몇차례 논란을 반복해왔고 최근에는 다시 한미투자협정와 스크린쿼터제의 분리 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투자협정 자체가 문제의 온상이다
정부와 언론은 이 과정에서 스크린쿼터제 유지를 요구하는 영화인들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며 스크린쿼터만 양보하면 당장 한미투자협정이 체결되고 외자유치의 길이 뚫릴 듯 호들갑을 떨어왔다. 그러나 수차례 영화인들과 사회단체들이 말해왔듯이, 문제는 스크린쿼터가 아니라 한미투자협정의 성격과 본질이다. 투자보장협정은 해외에 진출한 우리 기업을 보호하고 외국인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것으로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전반적인 규제 완화를 단행하는 등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통상 주요 내용의 하나인 통상보장협정에 포함되는 '이행의무 금지원칙'은 노동, 환경, 보건 및 안전 기준 등의 준수 의무를 적극적으로 완화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다.
투자협정 체결,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내주는 것일 뿐!
투자보장협정이 체결되면 노동·환경·안전 및 보건 기준이 완화될 것이고 이러한 조치들이 노동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 이시간에도 현장에서 하루 십수명의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손발이 잘려가고 있으며, 이를 산업재해로 승인받지 못해 산재노동자가 목숨을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나마 있던 알량한 규제조치를 완화시키고 더불어 외국인투자유치를 위한 모든 혜택과 조건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이 협정은 노동자의 건강 자체를 무장해제시켜버리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미 정부는 경제자유구역법에서 근로기준법 및 파견법의 일부 조항을 완화시켜버리지 않았던가!
전면화되는 한국보건의료체계의 상업화
투자보장협정은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거의 모든 투자를 자유화하고 있는데, 관계 법령의 제약이 없는 한 의료업 또한 예외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 투자협정은 '의무이행 금지원칙'을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투자협정 체결을 전후하여 외국인 투자 유인책의 하나로서 다른 관계 법령을 제정·개정하여 관련 기준을 완화시킬 개연성은 충분하다. 투자보장협정은 기본적으로 외국인 투자 유치를 목적으로 체결되는 것이므로 서비스개방분류 중에서도 'Mode 3 : 상업적 주재'에 해당하는 서비스 교역을 대상으로 삼는다. 다만 의료법에 따라 영리 의료기관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투자 가치'가 적은 것이 문제다. 당연히도 외국의료자본은 더 수월하게 이윤을 내기 위해 각종 규제완화 조치와 기업활동의 충분조건을 전제로 내걸게 된다. 관건적으로는 의료기관의 영리법인화 요구나 요양기관 강제지정제도 폐지, 민간의료보험의 도입 등이 전제로 내걸리는데, 사실 이는 국내 의료자본의 요구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투자협정·자유무역협정, 세계화를 퍼뜨리는 장치
정부는 이미 보험업법개정을 통해서 민간의료보험 도입의 법제도적 기반을 다져가려 하고 있다. 이제 좀 더 정확한, 그러니까 보험회사가 이윤을 더 많이 챙기면서도 보험 가입자에게 가장 비용-효과적인 상품을 구매한 것이라고 선전할 만한 사보험 상품이 개발될 수 있다. 보험회사가 먼저 돈을 벌게 될 것이며, 외국계 보험회사라면 제한 없는 송금도 가능하다. 그것이,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한 터라 문안만 손질하면 되는 네덜란드의 ING 생명일 수도 있고, 이 때문에 오히려 투자보장협정 체결에 가속도가 붙는다면 최대 수혜자는 미국의 AIG 생명이나 푸르덴셜 생명일 수도 있겠다.
공공의료기관을 찾아보기 힘든 한국사회에서 병원의 영리법인화 인정/민간의료보험 도입은 말 그대로 의료기관의 전면적인 상업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사회 의료체계에 필요한 기본적 의무사항과 규제들은 모두 폐기되어 버리고, 한마디로 시장과 경쟁 속에서 환자와 국민의 건강권이 '자율적인 선택권'이라는 이름으로 뒤바뀌어 버린다. 투자협정 체결의 본질은 결국 국내/외 자본의 이윤과 국민의 건강/생명을 맞바꾸는 것이다.
올 9월 WTO 제5차 각료회의가 칸쿤에서 진행된다. 이 각료회의 의제에서 논의될 서비스 협정에는 보건의료분야도 포함되어 있다. 협상의 진전 여부에 따라 구체적 범위는 달라질 수 있으며, WTO를 주도하는 국가들조차 이번 각료회의의 성사여부를 불투명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예상되는 실패를 최대한 보완하고자 하는 것이 양자간자유무역협정과 투자협정이다. 다자간 합의가 어려운 WTO협상에 비해 보다 수월한 양국가간 합의로 이루어지는 투자협정으로 교육, 의료, 문화 등의 공공서비스를 상품화하겠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초국적자본의 이윤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세계화란 결국 민중이 마시는 물 한방울까지 사유화시키고 보편적으로 누려야할 권리까지도 가격을 붙여 팔아먹는 것이다. 그 탐욕을 채워주기 위한 축이 WTO와 함께 제안되는 투자협정·자유무역협정임을 다시한번 각인해야 한다.
WTO해체! 투자협정·자유무역협정 반대!가 해답이다
WTO반대·투자협정 반대를 위한 투쟁은 그저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국제연대투쟁이 아니라, 각국 노동자민중의 삶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긴급한 현안투쟁이다. 전세계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생명과 존엄, 그리고 보편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초국적 자본과 소수 선진국 중심의 새로운 무역질서를 거부하고 이를 해체하기 위한 투쟁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각국, 지역, 그리고 전세계적 연대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미투자협정는 그저 스크린쿼터라는 한국사회 영화계의 이해관계에 국한되지 않으며 한국사회 전체국민의 이해를 고려할 때, 오히려 정부에서 당연히 거부해야 할 협정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한미투자협정과 그 외 진행되고 있는 수많은 투자보장협정과 자유무역협정에서 항상 이런 이해당사자의 관계를 부각시켜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분열시키고 고립시켜왔다. 이미 한일투자협정이 체결되었고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은 국회비준절차만을 남겨두고 있다. 한일자유무역협정 또한 지난 한일정상회담을 통해 구체적 추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외자유치와 투자자율화를 외치며 개방불가피론을 말하는 정부와 자본의 입을 틀어막고 시장개방 저지, WTO/투자협정, 자유무역협정 반대를 비롯한, 노동자민중의 삶과 권리를 외칠 때이다. 이러한 정치적 경험과 투쟁과정을 통해 한국사회 상업적 보건의료 질서재편을 저지하고 공공의료와 무상의료 쟁취를 위한 사회적 투쟁을 확산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
덩치는 커졌지만 속은 곯아 있는 의료보장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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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료연합 |
한국 의료보장제도의 과거와 현재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 시대의 시작 이후 보험혜택의 범위도 점차 확대되었고, 2000년 직장, 지역, 공무원·교직원으로 나누어져 있던 보험조합이 통합되면서 관리운영체계도 개선되어 나갔다. 의료보험 관리운영체계의 통합과 국민기초생활법 시행으로 의료보험제도와 의료보호제도는 각각 건강보험제도와 의료급여제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개선에도 불구하고 의료보장제도는 속부터 곯아가고 있었다.
공적 의료보험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의료기관의 상당수가 민간 소유인 캐나다의 예를 보자. 우리나라와 흡사한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캐나다는 '공적 재원(의료보험)'을 활용해서 '민간의료기관의 영리추구 경향'을 잘 조절하고 있다. 즉 '진료비'라는 돈줄을 움켜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민간 소유인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공적 역할을 담당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캐나다 민중의 건강수준과 의료제도에 대한 만족도는 세계에서 최고 수준이다.
캐나다의 의료보험제도는
좌익정당으로서는 북미대륙에서 최초로 집권한 CCF (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 Party)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CCF는 1944년 사스카췌완주 선거에서 '의료의 사회화(Socialized Health Service)'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고,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후 1947년과 1962년에 각각 병원서비스와 의사진료(외래 포함)에 대한 진료보장이 이루어지면서 '무상의료'에 가까운 의료보험제도가 만들어졌다. 그 와중에 사스카췌완주 의사들은 23일 동안 파업을 하는 등 결렬하게 반대를 했지만 의료보험제도의 확대를 막지는 못했다. 사스카췌완주의 선진적인 의료보험제도는 캐나다 연방의 다른 주로 확산되었으며, 1987년 캐나다 연방의 모든 주에서 일체의 본인부담금이 없어지면서 '무상의료'가 실현되었다.
캐나다 의료보장법은 의료보장제도의 기본원칙으로 아래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공적 관리 : 의료보장제도는 주정부 책임 하에 비영리공공단체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
2. 포괄성 : 주정부는 의학적으로 필요한 의사 및 병원서비스에 대한 포괄적인 보험급여를 제공해야 한다.
3. 보편성 : 보건의료서비스는 주 관할 내의 모든 거주민이 이용가능해야 한다.
4. 이동성 : 모든 피보험자는 일시적으로 주 관할 지역을 벗어나는 경우에도 보험급여 혜택이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5. 접근성 : 보건의료서비스의 적정 이용에 방해가 되는 본인부담이나 기타 경제적 부담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공적 재원(의료보험)'을 통해 '민간의료기관의 영리추구 경향'을 조절하기는커녕 오히려 의료보험이 민간의료기관의 영리추구 욕구를 채워주는 수단으로 전락해 있다.
의료보장제도 실시 이후 민간의료기관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의료보장제도가 확대되면서 병원이용을 할 수 있는 대상자 수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비스를 제공하면 할수록 돈을 더 벌 수 있는 '행위별수가제'와 민간의료기관을 견제할 수 있는 공공의료기관의 부재는 '민간의료기관의 급성장'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었다. 게다가 의료보험을 거치지 않고 환자에게 진료비 전액을 직접 받는 '비급여 의료서비스'의 존재는 민간의료기관의 영리추구 행위를 더욱 부채질했다. 의료기관은 비급여 고가, 고급의료서비스를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일본 다음가는 고가 의료장비 천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경제적 부담은 고스란히 노동자·민중에게 전가되었다.
의료보장제도는 민간의료기관을 '영리 추구'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하는 만들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수단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자본가 정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그럴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의료보장제도는 '돈벌이' 중심의 상업적 의료체계를 성장·발전시키는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민간의료는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되었는데, 심지어는 정권마저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보장제도는 ‘노동자․민중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민간의료기관이 돈 벌어 먹기 좋게 ‘민간의료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져 있다. 건강증진이나 질병예방이 아니라 치료서비스가, 동네의사의 일반진료가 아니라 대형병원의 전문고급진료가 더 대우받는다. 돈벌이에 골몰하는 민간의료기관은 항아리에서 꿀 떡 빼먹듯 건강보험에서 잘도 쏙쏙 빼먹는다. 노동자․민중에게 돌아가는 혜택 늘리는 건 고사하고 현재 수준을 유지하는 것도 벅차다.
드디어 건강보험재정이 바닥을 드러냈다. ‘민간의료’라는 거대한 괴물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먹어치우는 상황에서 건강보험재정이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재정 파탄을 빌미로 그렇지 않아도 부실한 의료보장제도는 더욱 부실해지고 있다.
"그래도 의료보장제도의 혜택은 예전보다 크게 늘어나지 않았는가?"
물론 맞는 말이다.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을 출발할 당시와 지금의 혜택 수준 사이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다. 보험적용 일수도 365일로 늘어났고, 보험적용 항목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의료보장제도에 대해 느끼는 민중의 불만이 예전에 비해 더욱 커진 것도 사실이다. 왜 그럴까? 혹자의 말대로 사람 욕심이란 것이 한도 끝도 없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다. 민중의 불만은 염치없는 욕심이 아니라 당연한 요구이다. 전국민의료보험이 출발하던 당시에는 의료서비스 이용에 대한 민중의 최소한의 욕구조차도 억눌려 있던 상태였다.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기란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국민의료보험이 출발하면서 최소한의 의료서비스는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민중입장에서는 좋아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1989년이 아니라 10년 세월을 훌쩍 넘긴 21세기이다. 그 사이 민중은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한 다양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건강한 삶을 위한 민중의 권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된 과정이기도 하다. 일부 치료서비스에 치중된 의료보장제도의 혜택으로는 더 이상 민중의 건강한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민중은 자신의 머리로,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 동안 이루어진 의료보장제도의 외형적 개선은 이런 민중의 욕구를 채워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따라서 정부가 그토록 자신의 치적으로 자랑하는 의료보장제도의 외형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의료보장제도와 민중의 욕구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져갔다. 민중의 불만이 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음호에 계속> |
고상하게 살 권리, 고생하며 살 권리 - 노인요양보장제도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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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료연합 |
아침에 출근할 때, 이삼일에 한 번은 마주치는 할머니가 있다.
초라한 옷차림에 한껏 움츠러든 몰골을 한 그 할머니는 항상 낡고 작은 수레를 끌고 있는데, 수레에는 신문지 뭉치, 쓰다버린 옷걸이, 심지어는 낡은 TV 등속이 실려 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조정래의 '한강'에서 신설동 산동네에서도 터를 잡지 못한 시골 촌놈들이 움막이나 판잣집을 짓고 살던 곳으로 거명된 동네이다. 지금이야 1950년대처럼 무허가 판잣집은 없지만, 아직도 마을버스를 타지 않으면 가쁜 숨을 몇 번은 몰아쉬어야 집에 도착할 만큼 가파른 산동네이다. 그런 산동네를 할머니는 자기 몸보다 더 큰 수레를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끌며, 매일 오르고 있다. 저녁에 퇴근을 할 때에도 누군가의 집 대문 앞에 내어놓은 재활용 쓰레기를 뒤척이는 할머니를 보곤 한다. 이슬이 채 걷히기 전인 이른 새벽부터 사방이 어둑어둑한 저녁까지 할머니는 힘들게 수레를 끌고 있다.
나는 그 할머니를 볼 때마다 재활용 쓰레기를 집 밖으로 내어놓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곤 한다. 재활용 쓰레기를 내어놓으면, 마치 할머니가 끌어야 하는 수레에 짐을 더 얹는 것 같은 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든 노동으로 할머니가 만지게 되는 돈은 하루에 기껏해야 몇 천원, 많아야 만원을 조금 넘는다.
짐작컨대, 할머니의 젊은 시절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젊어서의 팔자와 늙어서의 팔자가 180도 달라지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대다수 사람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매 한 가지의 팔자대로 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지금 끌고 있는 수레의 무게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노동에 짓눌려 살아 왔을 가능성이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보다 훨씬 클 것이다. 그 할머니가 언제 그 고된 노동에서 자유로와 질 수 있을까?
외국과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급속한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다.
2000년 전체 인구의 7%를 넘어선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2019년 14.4%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급속한 고령화의 속도만큼이나 고령화를 겨냥한 돈의 움직임도 부산스럽다. 올해부터 판매되기 시작한 민영 장기간병보험은 올 매출이 약 100억원, 향후 성장률은 연 100% 이상일 것으로 예상된다.
민영 장기간병보험은 보험회사와 가입자의 조건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월 보험료가 15만원 이상이다. 실버산업의 꽃이라 불리는 실버타운은 2002년 말 현재 전국적으로 32개에 이르고 있는데, 구매력을 갖춘 노인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앞으로 더욱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 인근의 한 실버타운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실버타운 입주비는 1∼3억원 내외, 간병비를 포함한 월 관리비는 200만원을 넘는다. 치매를 앓고 있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있는 집안은 '노인병원'을 떠올리게 된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해서, 이제는 한적한 교외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치게 되는 노인병원의 한 달 입원비용은 150만원을 넘는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추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실버산업의 시장규모는 2000년 17조원, 2005년 27조원, 2010년 41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바야흐로 노인인구가 주요한 소비계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를 맞이한 일본의 경우, 소아과나 산부인과의 인기는 떨어지는 반면, 노인의학이나 재활의학, 신경과 등은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또 배낭여행이나 장난감 산업은 점차 몰락하는 반면, 크루즈여행과 각종 보장구 산업은 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이윤이 생기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내어 시장을 형성시켜 내는 자본주의의 일반 법칙에서 '고령화'도 예외는 아니다.
고령화와 이에 따른 산업 전반의 변화는 노인에게 고상하고 안락한 노후를 보장해 줄 것이다.
치매에 걸리거나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 이르면, 노인병원이나 요양시설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 비용의 일부는 장기간병보험으로 충당할 수도 있다. 자식에게 의지하기 싫은 노인은 실버타운도 고려할 만하다. 실버타운은 시설에서부터 세부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노인의 즐겁고 편안한 삶을 위한 세심한 배려로 가득 차 있다. 어지간한 의료처치와 간호도 실버타운에서 해결된다. 갑갑증이 나면, 크루즈여행은 어떤가? 호화 여객선의 갑판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노라면, 어느샌가 별천지 같은 해양관광도시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단, 이 모든 안락함은 수십년 동안 매월 15만원 이상의 장기간병보험료를 낼 수 있는 사람, 덜컥 치매라도 걸리면 매월 150만원 이상의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 1∼3억 내외의 입주금과 매월 200만원이 넘는 관리비를 낼 수 있는 사람,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크루즈여행비를 부담없이 내 놓을 수 있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다. 만약 이런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은 고상하고 안락한 노후를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아라.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수레를 끌어야 연명하는 그런 노인을 위해 '실버산업', '자본주의 시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이 움직이는 속도에 비하면 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아무튼 정부는 올 3월 「공적노인요양보장추진기획단」을 구성·출범하면서 요양보장제도 도입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2007년부터 단계적으로 요양보장제도를 실시해서, 2010년에는 전체 대상인구의 공적요양보장이 실현된단다.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노인전문병원과 요양시설 건립 계획을 제시하는가 하면, 농어촌 지역은 당장 내년부터 노인요양보장제도를 시행할 것이라는 계획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잇따른 계획 발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노인보건과 복지문제에 대한 우려는 별로 가시질 않는다.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이 분명 낫겠지만, 지금의 건강보험처럼 취약한 보장성이라면 노인의 시름을 크게 덜어주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양서비스에 필요한 재원을 공적 기전으로 마련해도, 요양서비스 공급을 민간에게 의존한다면(지금의 건강보험이 이런 식이다. 공적 재원조달 - 민간 서비스 공급), 도리어 보건과 복지문제에 대한 시장지배력을 더욱 확장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건강보험과 의료급여제도가 있어도 민중이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요양보장제도가 만들어져도 노인의료와 요양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건강보험도 이 모양인데,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아직까지 지배적인 노인부양 문제야 어련하지 않겠는가? 결국 요양보장제도는 건강보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취약한 보장성을 가진 '최소한'의 제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정부의 요란스런 발표만 믿고 넋 놓고 있다간 된서리 맞기 십상이다. 각자 알아서 부지런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조차도 쉽지 않다. 현실의 건강과 삶에 대해서조차 무방비 상태인 경우가 많은 대다수 민중이 미래의 노후를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을 리 만무하다.
결국, 젊어서의 팔자가 늙어서까지 이어진다. 젊어 고상하게산 사람은 늙어서도 고상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젊어 죽어라 고생한 사람은 늙어서도 매 한 가지다. 노인의료와 요양문제 뿐 아니라 사회보장제도 전반의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천년만년 그럴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고상하게 살 권리'와 '고생하며 살 권리'가 태초의 낙인처럼 찍혀 있다.
팔자가 더러워서 젊어 고생한 사람도 늙어서는 인간답게(고상한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자신의 삶을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위정자집단은 이런 바램조차 수용할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다. 모든 문제에 대해 그렇듯 '노인의료와 요양'에 대해서도 민중적 해법과 직접 행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니고는, 죽어서야 지워질 태초의 낙인을 살아서 벗어날 길이 없다. 비 내리는 오늘도 할머니는 무거운 삶의 수레를 끌고 있다.
P.S. 요즘 경제가 어렵다보니, '복지의 과잉'을 거론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다. 독일이 그것 때문에 침몰하고 있다느니, 서구 복지국가도 모두 복지를 축소하고 있다느니... 이렇게 '복지의 과잉'을 외치는 지식인 나부랭이 중에서 '공적 복지'를 아쉬워하는 이는 없다. 이들은 굳이 '공적 복지'가 아니어도 늙어서 제 한 몸 추스르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사적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이의 눈에는 쥐꼬리만한 '공적 복지'조차도 '과잉'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만약 말 꽤나 하고 글 꽤나 쓴다는 이들이 늙어서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든 궁핍한 상황이라면, 신문에서 '복지의 과잉'이니 '복지병' 따위의 문구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먹물 지식인은 이율배반적이며, 후안무치하며, 천박하다. |
미국의 질병범위 제한 철회 - 좋은 소식? 나쁜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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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영 |
9월 칸쿤회의에서의 뜨거운 감자, 의약품과 지적재산권
9월 멕시코 칸쿤에서의 WTO 각료회의를 앞두고 의약품과 지적재산권부분에서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사이의 대립이 가시화되고 있다. 2001년 11월 14일 카타르의 도하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에서 "TRIPS 협정(무역관련 지적재산권 협정)과 공중 보건에 대한 선언문"이 채택되어 '각 회원국의 강제실시 권리'를 확인하기는 했지만, 의약품을 직접 생산할 능력이 없는 국가들이 의약품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싼 제네릭(카피약)을 수입하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01년 도하선언 6항은 2002년 말까지 TRIPS 이사회에서 해결책을 찾기로 규정하였으나, 강제실시의 범위를 제한하려고 하는 미국의 반대로 인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질병범위를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 등 19개의 질병'으로 제한을 두고, '국가 비상사태나 긴급한 상황'에서만 허용하자고 주장을 한 반면, 개발도상국은 `공중보건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질병으로 적용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며 어떠한 제한도 두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수혜국(강제실시로 생산된 제네릭 의약품을 수입할 수 있는 국가)의 범위에 있어서 미국과 유럽연합은 OECD회원국과 고소득 개발도상국을 제외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나, 개발도상국은 소득과 같은 경제적 기준에 의한 구분에 반대하며 생산시설보유여부에 따라 수혜여부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한발양보 - 무엇을 위한 양보인가?
6월 21일-24일 이집트에서 열린 WTO 비공식 각료회의에서는 미국은 질병의 범위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마냥 기뻐하기에는 석연치가 않다. 미국의 한발양보에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대로 작년 12월 도하선언 6항의 해결방안에 대한 합의가 무산됨에 따라, 미국은 그로 인한 비난과 불신을 받아왔다. 미국의 한발양보뒤에는 질병범위의 제한이 미국의 뜻대로 관철되기 어렵다는 판단과 국제사회에서의 불신을 극복하겠다는 의도, 수혜국제한과 보호조항강화로 다국적 제약회사와 자국의 이익을 챙겨보겠다는 계산이 숨어있는 것이다.
강제실시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려는 미국의 시도 - 수혜국 제한
미국은 수혜국의 범위를 최빈국과 일부 저소득 개발도상국으로만 제한하려고 한다. 이렇게 된다면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냐, 가나, 나이지리아, 짐바브웨, 우간다와 같은 대부분들의 개발도상국들은 약간의 의약품 제조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수혜국 대상에서 배제된다. 또한 브라질, 말레이시아,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필리핀, 어느 정도의 경제적 발전을 이룬 중진국들은 수혜국 범위에서 당연히 배제될 것이다. 이는 TRIPS를 “모든 이들의 의약품 접근성 향상”를 위한 방식으로 이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도하선언 4항에도 전혀 맞지 않는 제안이다.
값싼 제네릭 의약품이 오늘날 존재하는 것에는 제네릭 AIDS 약을 구입하기로 한 브라질의 힘이 컸다. 브라질의 제네릭 의약품 구매는 제네릭 공급자들에게 판매시장을 형성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이렇게 해서 생산된 제네릭 의약품은 아프리카의 최빈국들에게도 공급될 수 있었다. 미국으로 대변되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제네릭 시장을 최빈국으로만 축소시킴으로써 제네릭 생산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 미무역대표부의 Robert Zoellick은 필리핀 대통령 Arroyo에게 "미국은 필리핀이 강제실시와 같은 체계를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Zoellick의 발언은 필리핀과 같은 개발도상국, 특히 중진국은 의약품의 접근성 향상을 위해 강제실시와 같은 국제적으로 보장된 제도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수혜국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제한하거나 애매모호하게 규정하여, 자유무역협정과 같은 양자간/지역협정을 통해 각국이 강제실시를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강제실시권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받아들일 수 없다.
수혜국 제한이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강제실시권의 사용을 무력화 한다는 이유로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미국의 제안에 반대하고 있다. 브라질은 필수의약품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현재의 프로그램은 값싼 의약품수입능력 또는 더 나은 가격을 협상하기 위한 강제실시권사용 위협이 없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말레이시아와 태국은 HIV/AIDS 의약품의 무상공급을 고려하고 있으나 저가 의약품을 수입하지 못한다면HIV/AIDS 의약품의 무상공급은 어렵다고 주장했다.
한국역시, 이러한 논의에서 비껴 갈 수 없다. 얼마 전 글리벡 투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약회사의 특허로 인해 약을 먹지 못해 죽어야 하는 환자들은 한국에도 있다. 백혈병 환자들은 현재 비싼 약값을 부담하지 못해 인도에서 생산되는 글리벡의 제네릭인 '비낫'를 직구매하여 복용하고 있다. 인도나 한국이 의약품 제조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혜국대상에서 배제된다면, 우리나라의 백혈병 환자들은 인도약인 '비낫'을 직구매 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렇듯 중진국과 가난한 국가들의 운명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 이상은 의약품특허와 강제실시문제를 가난한 국가들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가 없다. 수혜국 제한이라는 미국의 제안은 중진국뿐만 아니라 최빈국 민중들의 의약품 접근권을 방해하고 다국적 제약회사의 이윤만을 확보하겠다는 의도이다. 다국적 제약회사와 미국에 맞서 전세계 민중의 의약품 접근성을 옹호하는 국제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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