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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3 호 - 2003.10.20



대중의 직접행동만이 파병을 막을 수 있다!




   조회 : 2862 강 동 진 (보건복지민중연대 대표)


미국의 파병요구에 호응하여 노무현 정부는 파병을 위한 수순을 지속적으로 밟아 왔다. 겉으로는 국민여론을 비롯하여 다각적으로 신중히 검토한 후에 결정을 했다고 했지만, 정부 각료의 입을 빌려 드러난 '파병국익론' '한반도평화 연계론' 등에서부터 '무조건 파병론' 심지어는 파병거부시 경제 보복등의 조치가 예상된다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파병불가피론' 등에 이르기까지 의견은 다양하게 나왔다.

또한 이를 언론을 통하여 무차별적으로 살포하는 언론공세 뿐만 아니라 그 진상이 조사단에 참여했던 한 교수에 의해 폭로되어 버린, 파병의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임이 드러난 이라크 조사단 파견 등 절차와 수순까지 밟아 나가고 있음이 이미 확인되었다. 정부, 보수정당, 재벌언론 등 다방면에 걸쳐 민중을 향한 파병공세가 취해지고 있지만 파병을 반대하는 여론은 잠재워지기는커녕 이를 조직하기 위한 투쟁은 점점 고조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파병을 반대하는 것은 단지 '명분없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만이 아니다.

현재 전쟁으로 인하여 이라크 민중의 삶과 생명이 더 이상 고통받는 것을 '관찰자'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주체적인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중단시키겠다는 의미이다. 지난 수많은 반대여론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는 700여명에 달하는 부대를 파견하였다. 이 전쟁에서 민간인 6천명이 죽고 2만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규모는 앞으로 기아와 질병, 전쟁 후유증 등에 의해 더욱 더 늘어날 것이다. 미군 사망자 105명을 비롯하여 이라크군 사망자도 3천명을 웃돌고 있으며, 일부 외신 보도에 의하면 미군의 부상자는 6천명이상이나 된다는 보고도 있다.

비록 직접적인 전투병을 파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군대를 보냈다는 것은 이러한 야만적인 전쟁을 막기는커녕 이에 동참했다는 의미이다. 미국이 '종전'선언을 하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라크 내에서는 미군의 존재에 의해 끊임없는 충돌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며, 이는 '전쟁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쟁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되며, 설사 유엔 결의 등의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파병은 결단코 허락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가고 말고를 결정하는 것은 정부나 국회가 아니라 이 땅의 노동자·민중이다. 지금 시기는 보수정치꾼이 말한 '뭘 모르는 국민'이 아님을 보여줘야 할 때이다.


또한 파병을 반대한다는 것은 이 사회의 민중과 미국의 민중, 전세계의 민중이 전쟁에 의하여 자신의 삶과 생명이 악화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예방하겠다는 적극적인 전략이자 투쟁이다.

이미 서희·제마 부대의 파병에 500억원 이상되는 비용이 소모되고 있으며, 부시의 일방적·패권적 전쟁으로 인한 피해속에서 '재건비용'이라는 명목으로 우리 정부는 5천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파병이 이루어질 경우 적게는 년간 2천억원에서부터 많게는 4조원에 이르는 비용이 필요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올해 제출된 2004년 예산의 경우 복지예산이 8%정도 2003년보다 증액되었다고는 하나, 이미 10%에 달하고 있는 빈곤층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임은 이미 지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파병을 통하여 추가 비용을 낭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의 경우 매달 40억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소모하고 있으며, 또한 800억달러에 달하는 추가비용을 의회에 제출하고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러한 비용은 모두 노동자·민중의 피와 땀에 의한 세금으로 충당된다. 민중의 삶을 위해 쓰여져야 할 돈이 더럽고 야만적인 전쟁 수행을 위한 비용으로 쓰여지고 있고, 쓰여지려 하는 것이다. 반면에 부시행정부가 등장한 후 매년 1000억달러에 이를 정도로 늘어난 국방예산은 대부분 록히드 마틴, 보잉, 제너럴 다이내믹 등의 군수기업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있으며, 이라크 전후 재건을 위한 사업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미국의 국방성과 연관된 일부 기업의 호주머니를 채워주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복지예산이 부시행정부 등장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했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예를 들어 미국에서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인구만도 4천만명에 달하고 이 숫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파병반대는 민중의 삶과 생활이 악화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삶이 더욱 나아지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파병 반대는 한국민중 뿐만 아니라 이라크 민중, 미국의 민중, 전세계 민중의 삶과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생존권과 생명권을 국제적으로 실현하는 투쟁이다.

 


  • [기획연재]에바다 투쟁 보고서 2. 에바다 투쟁 이야기 - (3) 에바다 투쟁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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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헌(민중복지연대 공동사무국장)

    에바다 투쟁에는 처음 투쟁을 시작한 농아학생과 교사들 외에 지역 노동자, 대학생들을 비롯하여 전국의 많은 사회운동 단체들이 함께 결합하였다.

    에바다가 위치한 평택과 인근 경기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에바다 비리재단 퇴진과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전국적으로는 인권, 장애운동 단체들과 전교조 특수교육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가 결성되어 투쟁에 함께 하였다. 또한 장애운동에 전망을 가진 대학생들이 결성한 '전국 에바다 대학생 연대회의' 역시 투쟁에 있어 비중있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처음 투쟁을 시작했던 직접적인 투쟁주체라 할 농아학생과 교사들이 꿋꿋하게 투쟁을 지켜온 것도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주요한 근거가 되었지만 이와 함께 지역의 노동자·학생들을 포함한 전국적인 차원에서 운동세력의 끊임없는 결합과 지원이야말로 직접적인 투쟁주체들로 하여금 끝까지 투쟁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도록한 주요한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사회운동세력들이 에바다 투쟁에 어떤 경로를 통해 결합하였으며, 그들이 에바다 투쟁에서 가졌던 역할과 그에 대한 평가들을 진행해 보고자 한다.


    1) 에바다 투쟁의 확장

    투쟁은 처음 농아학생들의 비리재단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온갖 비리와 폭력으로 얼룩진 비리재단의 퇴진을 요구하는 농아학생들의 농성이 96년 11월26일 시작된 이래 뜻있는 교사들이 이에 동참하였고, 에바다에서의 비리와 인권유린 사례들이 전국적으로 폭로되면서 곧 장애인권 운동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들과 지역의 운동세력들이 결합하였다. 이들은 97년 8월 '에바다 비리재단 퇴진과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를 발족시키고 이를 통해 에바다 투쟁에 결합했고 대학생들은 투쟁시작 후 1년여만인 97년 12월 '전국 에바다 대학생 연대회의'-이하 대학생 연대회의-를 발족시켜 이 단위를 통해 공대위에 결합하게 된다.

    이후 에바다 투쟁이 천일을 맞기 전까지 투쟁은 공대위를 통해 주도되었다. 공대위에는 투쟁을 처음 시작한 농아학생, 교사들과 같은 직접적인 투쟁주체들과 민주노총 평택지구협의회와 평택 민주노동자회를 비롯한 지역 노동운동단체, 쌍용, 기아, 만도를 비롯한 지역의 크고 작은 사업장의 현장조직들이 함께 참여하였고, 대학생들 역시 대학생 연대회의를 통해 공대위에 결합하였다. 그 외에도 공대위에는 통일, 의료, 복지, 인권 등 지역의 각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에바다 투쟁이 천일을을 넘기면서 에바다 투쟁은 다시 확장된다. 천일을 기점으로 1999년 7월15일 '에바다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가 전국적 차원에서 결성되고 여기에는 인권단체들과 장애인 운동단체들, 그리고 전교조 특수교육위원회 등이 중심으로 참여하였다.

    에바다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공대위, 연대회의 등을 통해 투쟁에 결합한 지역의 노동자, 학생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은 나름대로의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에 기초해 투쟁을 진행해 나갔다. 투쟁에 필요한 동력의 창출은 공대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공대위를 통해 함께 하던 민주노총 평택지구협의회와 각 현장 조직을 통해 에바다가 지역의 수많은 현장에 전파되었고, 대학생 연대회의는 학생운동의 각 단위들에 에바다 문제를 선전하고 투쟁에 결합할 것을 촉구하였다.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법률적 문제를 비롯한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산 인권센터와 같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교조를 통한 투쟁의 선전과 조직화도 이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처음 투쟁을 시작했던 농아학생들과 교사들도 활발히 움직였다. 그들은 결코 외곽에서의 에바다에 대한 지원을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지역의 각 투쟁현장을 활발히 돌아다니면서 함께 연대하고, 연대하는 과정에서 다시 에바다의 상황을 선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에바다 투쟁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활발한 투쟁의 확장은 2002년을 넘어서면서 고비에 직면하게 된다. 99년 국회의원 이성재가 관선이사로 파견된 이후 이사진 개편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으며 이 투쟁의 결과 2001년부터는 공대위 추천 인사들이 점차 이사회에 적을 올리게 되고 2002년에는 완전히 절대다수를 장악하게 된다. 이는 분명한 투쟁의 성과였으나 이는 동시에 승리에 대한 속단으로 이어지면서 투쟁의 전술적 흐름을 지나치게 이사회 중심으로 치우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또 이와 함께 투쟁이 5년을 넘어 장기화 되면서 투쟁에 결합하는 각 단위의 집중력 역시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2002년 7월15일 농아원 진입 투쟁 당시 순간적으로 투쟁의 흐름이 살아나는 듯 하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에바다 투쟁은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한편에서는 '이사회를 장악했으면 다 승리한 것 아니냐' 라는 승리에 대한 속단과 한편에서는 '6년을 싸워 이사회까지 장악했지만 결국 해결되지 않는다' 라는 낙담이 교차하면서 전체 투쟁전선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많은 단체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이사회에서 새로 임명한 에바다 장애인 종합 복지관 관장 직무대행의 독단으로 인한 문제가 겹치면서 투쟁은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2) 고비를 넘어 승리로

    ① 문제의 해결

    고비는 오래 가지 않았다. 2002년 당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투쟁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 공대위 또는 연대회의의 논의 체계 중심으로 갈 것인가? 또는 이사회 중심으로 할 것인가? 둘째, 점차 떨어져가는 에바다 투쟁에의 집중력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셋째, 투쟁에 문제가 되고 있는 복지관장 직무대행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사실 에바다 투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투쟁이 장기화 되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중간 중간에 성과들이 나오게 될 때 이런 문제들은 어느 투쟁 현장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에바다에서는 이런 문제를 할 수 있는 가장 슬기로운 방법으로 해소하였다고 자부한다.

    에바다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각 주체들의 건강한 사고와 활동도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그와 함께 민주적이고 투명한 논의와 논의 결과에 대한 공동책임이라는 기본 논의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논의와 그 결과에 대한 공동책임의 원칙이 지켜지면서 이는 투쟁에 결합하는 각 주체 상호간의 신뢰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상호간의 신뢰는 투쟁을 지속시키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으며 이를 깨뜨리는 행위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위의 문제들 중 첫번째와 세번째 문제는 민주적인 논의과정을 통해 해소하였다. 2002년 5월, 에바다 농아원에의 진입과 관련한 투쟁계획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첫번째 문제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논의는 역시 민주적이고 투명하게 진행되었으며 논의 결과는 공대위와 연대회의 중심으로 전체 투쟁을 가져가고 이사회는 전체 투쟁 중 합법 전술을 구사하는데 있어 최종 승인과 집행을 담당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 논의 결과는 끝까지 유지되었다.

    세번째 문제 역시 민주적 논의 과정을 기반으로 해소되었다. 사실 복지관장 직무대행의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공대위 추천 이사들이 이사회를 장악한 이후 처음으로 임명한 복지관장 직무대행이 복지관 직원은 물론이고 그동안 함께 투쟁해 왔던 동지들과도 불화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등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친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으나 논의하여 합의하면 일주일도 못가서 복지관장 직무대행에 의해 번복되는 과정이 계속되었다. 결국 공대위와 연대회의, 그리고 에바다 이사회는 새로운 정식 관장 공채를 서두르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복지관장 직무대행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하지만 그의 반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오랜 투쟁 과정에서 민주적인 논의와 공동책임이라는 원칙이 지켜져오면서 확립된 투쟁주체들 상호간 신뢰관계가 공대위, 연대회의, 이사회의 결정에 밑받침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복지관장 직무대행을 추천했던 단위가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섰고 결국 2003년 3월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그러나 두번째 문제의 경우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장기화된 투쟁, 이사회를 장악하고도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에바다 투쟁에 지치기도 하였거니와 김대중 정부 5년간 계속되어 온 신자유주의 정책들로 인해 곳곳에 수많은 쟁점들이 일어나면서 에바다 투쟁에 대한 각 단위들의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져 갔다. 이러한 문제는 2002년 7월15일 진입투쟁을 경과하면서 잠시 해소되는 듯 하였다. 7월 진입투쟁을 통해 형성된 에바다 투쟁에의 집중을 유지하기 위해 공대위는 해아래집을 '투쟁상황실'로 설정하고, 서울에는 민중복지연대 사무실을 '서울상황실'로 설정하여 투쟁에 대한 집중을 높여가고자 하였으나 이 방안은 채 한달도 유지되지 못했다. 다른 문제들은 점차 해결되어 갔지만 이 두 번째 문제는 진입 직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로인해 당초 4월말, 5월초로 상정했던 농아원 진입시도 역시 늦춰지고 있었다.


    ② 진입과 승리

    이사회와 공대위의 문제는 민주적 논의과정을 통해 오래전에 정리되었다. 문제를 일으키던 복지관장 직무대행의 문제도 3월을 고비로 완전히 정리되었으며 공채를 통해 선임한 신임관장에 의해 복지관은 점차 정상을 되찾아 갔다. 그동안 농아원과 학교가 폐쇄되어 해아래집에서 수업과 행정업무를 진행하던 학교는 2003년 3월31일부터 복지관 3층을 임시학교로 선정하여 이전하면서 일차적으로 수업이 정상화 될 수 있었다. 학교 수업이 근 14개월만에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농아원을 불법점거하고 있던 최씨 일가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학교 수업을 정상화시키는 과정에서 과감하게 단행한 인사권의 발동으로 최씨 측에 충성을 바치던 교사들과 직원들도 점차 새로운 이사회와 운영진의 지시에 따르기 시작했고, 농아원에 아이들을 맡겨 놓았던 학부모들도 해아래집의 성장과 함께 아이들을 농아원에서 데려와 해아래집에 맡기기 시작했다. 최씨 일가의 고립과 함께 이탈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진입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농아원 내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 판단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되었던 두번째 문제, 즉 에바다 투쟁에 대한 각 단위의 집중이 얼마나 이루어질수 있을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17일 '4.20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 주간'을 맞아 기획한 에바다 문제 해결을 위한 민중행동의 날 행사가 있었고 이에 대한 집중도를 통해 실제 가능한 동력을 가늠해보고자 하였으나 이 역시도 여의치 않았다. 진입은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일단은 에바다 문제해결을 위한 대통령께 편지쓰기 운동을 진행하면서 사회적 관심을 다시 끌어보자는 계산 아래 진입은 5월말-6월초로 연기되었다.

    만약 이번에 시도될 진입투쟁이 어설프게 끝난다면 우리 역시 일정정도의 타격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최종 결정은 5월말이 거의 닥쳐서야 이루어졌다. 평택경찰서장이 바뀌고 난후 가진 경찰서장면담과 새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루어진 청와대 면담이후에야 진입결정이 이루어졌다. 경찰이 최소한 이사들에 대한 신변보호는 하지 않겠느냐는 어렴풋한 판단 속에 이사들이 법인 사무실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최소한의 목표치로 설정하고 진입 날짜는 5월28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진입은 성공하였고, 약 10여일에 걸친 투쟁 끝에 최성창을 비롯한 최씨 일가를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③ 진입투쟁 성공이 주는 시사점

    진입 날짜를 결정한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힘이 얼마나 모일지는 의문이었다. 따라서 진입투쟁의 목표치도 최소치로 설정되었고, 대오 조직화 목표도 최소치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최대한 경찰과 협조하면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졌던 우려는 기우였다.
    이미 2002년 진입투쟁을 전후하여 에바다 투쟁을 경기 노동자의 힘의 핵심사업으로 설정하였던 노동자의 힘은 진입 결정이후 평택지역을 비롯한 경기남부지역의 현장조직들을 통해 노동자 대오를 조직하였고, 그 외에도 그동안 에바다 투쟁에 함께 했던 지역의 각 단위도 나름대로 대오를 조직하였다. 이와함께 인근의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대오가 조직되어, 총 50여명의 대오가 조직되었다. 진입 투쟁을 위한 50여명의 대오가 농아원 앞으로 올라오자 최씨 측에서는 농아원생들을 시켜 정문을 폐쇄했고, 경찰은 공대위가 약속을 어겼다면서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이 실무자들에게 항의를 하는 동안 진입대오는 정문을 열고 신속하게 진입하였으며 곧바로 법인 사무실로 향해 최성창을 끌어내고 법인 사무실을 장악하였다.

    법인 사무실을 장악하고 내부를 안정시키는 동안 외부에서는 최성창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농아인들이 농아원 정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진입성공과 사수투쟁이 긴급히 요구된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지역의 노동자, 학생들이 추가로 집결하여 대치국면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약 10여일 동안 계속되는 대치국면 속에서 대중들, 특히 지역의 노동자들의 집중은 계속해서 이루어졌으며 결국 '중립'을 표방하면서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흔들어대던 공권력을 강제해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진입의 계획에서 성공에 이르는 과정은 앞으로 상정될 수많은 쟁점들과 투쟁들에 대해 몇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 투쟁을 계획하는데 있어 대중들에 대한 성급한 판단과 이로부터 나오는 패배주의에 대한 것이다. 투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얼마만큼의 대중들이 얼마만큼의 의지를 가지고 함께 할 것인가? 라는 의문으로 진입 투쟁에 대한 투쟁 지도부의 불안은 결국 기우였고, 투쟁이 시작되자 대중들은 '이번에는 해결한다' 라는 의지로 투쟁에 결합하였고, 진행과정에서도 자발적인 대중들의 결합은 계속되었다. 결국 지도부의 소극적인 판단과는 정반대로 투쟁의 국면에서 폭발한 대중들의 역동성은 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 투쟁을 계획하고 진행시킬때 대중들에 대한 과신과 맹신 역시 경계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가진 폭발적인 역동성에 대한 폄하나 속단으로 인해 패배주의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둘째, 정치조직이 갖는 현장성의 중요성이다. 이번 진입투쟁에서 다른 모든 단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적어도 진입과정과 이후의 대치와 사수 투쟁의 국면에서는 노동자의 힘이라는 정치조직이 그 힘을 발휘하였다. 노동자의 힘은 많은 우려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에바다 투쟁을 경기 노동자의 힘의 핵심사업으로 설정한 이후 에바다 투쟁에 꾸준히 결합해 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역시 대중들에 대한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현장성을 바탕으로 진입과 사수를 위한 동력을 창출해 냄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 [보건복지투쟁동향]직업상담원 조노 파업 소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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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연대



    [투쟁동향]직업상담원 조노 파업중
    노동부 비정규직 대거 고용, 노동착취, 임금착복 등 일삼아

    비정규직 확산을 막고 고용구조를 안정시켜야 할 노동부가 정작 비정규직을 대거 채용하는가 하면, 이들을 대상으로 노동착취에 임금착복까지 한 것으로 드러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지난 10월6일부터 전면파업에 들어간 직업상담원 노조원들은 노동부에 속된 비정규직들이다. 취업정보 제공과 실업급여 지급, 이주노동자 취업확인서 발급 등의 업무를 맡고 있는 이들은 끊임없는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분노하며 일손을 멈췄다. 파업이 시작되며 이들의 존재가 알려졌고, 노동부는 직격탄을 맞았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공언하던 노동부가 도리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이것도 모자라 악덕사업주 뺨칠 정도의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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