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자유총선으로 만델라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의 악명에 비견될만한 이상한 '공공의료'를 가지고 있었다. '공공의료'에 대한 전세계적인 상식과는 반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공공의료는 '소수 백인만을 위한 첨단기술 중심의 치료서비스'를 의미했다.
만델라 집권 이후, 공공의료는 전혀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소수만을 위한 첨단기술 중심의 치료서비스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보건의료'를 중심으로 공공의료를 재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5세 미만의 모든 영유아와 임신 여성에 대한 무상의료 제공'이었다. 1994년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루어진 공공의료의 변화를 상세히 알 수는 없다.
숱한 우여곡절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과거 백인 독재정권 통치시기에 극도로 왜곡되어 있던 공공의료가 제대로 된 정부를 만나서 비교적 정상적인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필자는 '공공의료'에 대한 상식을 또 한번 뒤집는 퇴행적인 상황을 목도하게 되었다. 한국의 부유층이 모여 산다는 강남 중심가에 문을 연 「서울대병원 헬스케어시스템 강남센터」가 그것이다. 지난 10월 14일 개원한 강남센터는 다음과 같은 미션(사명)을 제시하고 있다.
- 건강관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센터
- 평생건강을 계획·관리하는 센터
- 질병의 발생을 예방해주는 센터
- 즉시 체계적인 치료가 이루어지는 센터
- 쾌적한 환경에서 편안하게 건강진단을 받을 수 있는 센터
그러나 강남센터의 건강검진 프로그램은 기본적인 검사만 하는 가장 저렴한 것이 50만원을 넘고, 어지간한 것은 백만원을 훌쩍 넘는다. 이미 다음 달 말까지 예약이 모두 찼다는 '프리미엄 건강진단'은 350만원을 넘는데, 이 건강검진 수진자는 서울시내 특급 호텔에서 숙박을 하고, 강남센터에서 호텔까지 리무진 서비스가 제공되며, 전문 코디네이터가 직접 안내를 맡는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만한 비용을 부담하며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결국, 강남센터의 건강검진 프로그램은
대다수 서민에게 '건강검진'은 고사하고, '부유한 사람만이 건강관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받을 수 있으며, 부유한 사람만이 평생건강을 계획·관리받을 수 있으며, 부유한 사람만이 질병의 발생을 예방할 수 있으며, 부유한 사람만이 즉시 체계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며, 부유한 사람만이 쾌적한 환경에서 편안하게 건강진단을 받을 수 있다'는 냉혹한 절망감만을 확인시켜 줄뿐이다. 애초 건강검진센터 설립을 추진하며 서울대병원측이 공언했던 '대중건강검진'은 한낱 공염불이었다.
게다가 더욱 가관인 것은 '강남센터를 통해 예방의료를 활성화하고, 연령별·지역별·직업별 건강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수진자의 특성에 맞는 맞춤식 건강진단을 제공하겠다', '센터를 이용하는 환자의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평가함으로써 공공보건의료의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건강검진센터의 포부이다. 도대체 이들이 예방의료와 공공보건의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강남센터의 예약창구 관계자가 밝히고 있듯이 센터의 주고객은 이미 강남구 도곡동, 삼성동, 청담동 일대와 경기 성남시 분당 주민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강남센터의 예방의료와 공공보건의료는 일부 소수 백인만을 위해 존재하던 과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적 공공의료와 무엇이 다른가?
강남센터는 경제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공간적 측면에서까지 차별적 속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 삶의 공간이 분리·격리되어 가는 현 사회실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강남센터가 자리잡은 곳은 서민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호사스런 별천지, 그들만의 철옹성이다. 강남구 역삼동에 자리잡은 지하 8층, 지상 45층의 스타타워가 그곳인데, 강남센터는 이 빌딩 38층, 39층을 차지하고 있다.
국내 최고 건물 면적으로 자랑하는 스타타워에는 세계의 유수한 다국적기업의 사무실이 입주해 있으며, 귀 있는 사람이면 한번은 들었음직한 유명 브랜드의 패션쇼가 연일 열린다. 빌딩의 벽면과 갤러리에는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지하층에는 한꺼번에 500명이 운동할 수 있는 피트니스 클럽이 있다. 이 즈음되면,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건강검진 비용도 문제지만, 호사스러운 빌딩과 그 공간을 빼곡이 채우고 있는 명품, 그리고 유수한 다국적기업의 명패에 주눅들어 일반 서민은 근처에 얼씬거리기도 힘들 지경이다.
서울대병원측은 이렇게 항변한다.
"정부의 취약한 지원과 낮은 수가로 매년 상당한 규모의 적자를 보고 있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는 수익사업이 불가피하다. 강남센터 수익금의 80%는 어린이병원과 임상의학연구소에 지원될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본말이 전도되어 있다. 강남센터와 같은 수익사업은 부실한 공공병원의 존립기반을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선, 강남센터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이 서울대병원의 재정 적자를 얼마나 덜어줄 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서울대병원의 수익 추구는 공공병원에 대한 정부의 부담과 책임을 덜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계속 흘러가다 보면, 서울대병원의 재정적자는 더 이상 '정부의 취약한 재정지원 문제'가 아니라 '서울대병원이 수익을 제대로 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로 귀착되어 버릴 것이다. 서울대병원은 더욱 수익 추구에 열을 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서울대병원의 문턱이 높게만 보이는 일반 서민은 서울대병원에 더욱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우리와는 상관없는 곳 아닌가?'란 말을 곱씹으며 말이다.
사실, 서울대병원이 이렇게까지 흘러온 데에는
정부의 책임이 절대적이다. 이윤 추구를 위해 무한경쟁하는 의료환경 한 가운데로 '알아서 벌어먹으라며' 내동댕이쳐 놨으니 어느 공공병원인들 배겨낼 수 있었겠는가? 인술이니, 의료의 공공성이니 하는 말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과거 국영으로 운영되던 공공병원들이 독립법인(독립채산제)으로 바뀌면서 수익 추구 행태가 극심해진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내년 공공의료 예산은 늘어나기는커녕 올해보다 33%나 줄어들었다. 정부가 그렇게 선전하던 도시지역 보건지소 확충, 국가중앙의료원 설립, 국립보건원의 질병관리청(CDC)으로 확대개편 등에 관련된 예산은 한 푼도 책정되지 않았다. 더욱 걸작은 보건복지부장관의 발언이다. 담배값 인상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공공의료 확충이 안 된단다. 언제부터 담배값 인상이 공공의료 확충의 전제조건이 되었던가? 나로서는 금시초문이다.
이런 정부니, 그 밑의 공공병원이야 어련하겠는가? 의료에 문외한인 사람에게 국립대병원의 실태를 이야기하면, 대뜸 나오는 반응이 "사립대병원과 다를 것 없네?", "그런 병원에 왜 국민세금으로 지원을 해야돼?"이다.
서울대병원의 제자리 찾기를 위해서 '이상한' 정부에게 기대할 것은 더 이상 없다.
공공의료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것처럼 떠들었지만, 결국에는 무성한 말잔치로 때워 넘기려는 이들 아닌가? 강남센터같은 호화 건강검진 프로그램도 해답은 아니다. 오히려 수익 추구의 족쇄가 될 것이다. 행여 부유층의 건강이 심히 걱정되어서 서울대병원이 발벗고 나선 것이라면, 걱정 붙들어 매시라. 서울대병원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한국의 부유층은 자신의 몸을 충분히 건강하게 돌보고 가꾸고들 계신다.
서울대병원이 정작 해야 할 일은 서민의 건강과 질병문제를 진료 일선에서 대변하는 것이다. 취약계층이 자신의 몸을 건강하고 품위있게 유지할 수 있도록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돕는 것이다. 양질의 예방·진단·치료·재활서비스를 각급 (공공)의료기관과 연계하여 서민에게 저렴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돈'만 밝히는 이상한 병원들로 들어찬 이상한 나라에서 '정상적인' 의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서민이 서울대병원을 보고 등을 돌리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무한경쟁의 현행 의료환경에서 이렇게 하면, 당연히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그 대신 서울대병원을 '내 병원', '내 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병원', '없어서는 안 될 병원', '내가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병원'으로 생각하는 다수의 서민이 생겨나게 된다. 서울대병원의 제자리를 찾기 위한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디, 서울대병원이 비정상적인 시류를 쫓는 것이 아니라 '서민 속에 있는 서민의 공공병원'으로 탈바꿈하여 '정상화'되기를 바란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이상한 나라'이지만, 서민의 건강과 생명을 일선에서 다루는 (공공)병원만큼은 이상하지 않은 '정상적'인 것이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