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건대, 전의감과 혜민서는 주례에 있는 질의(疾醫)·양의(瘍醫)이다.
그러나 그 관청이 가난한 까닭에 재정이 없어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드디어 지극히 필요한 기관이 도리어 실속 없는 명칭만 남게 되었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 (중략) .... 위에서 말한 세 기관(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이 이른바 삼의사(三醫司)이다. 의학은 나라의 큰 정사이니, 지금은 그 법을 연구하고 밝혀서 명목과 실상이 서로 부합하도록 할 것이며, 형편없는 지경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쓴 경세유표(經世遺表)
제1권, 천관이조편에서 조선시대 의료를 담당하던 기관인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정약용 선생은 많은 저술 중에서도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자신의 노작으로 꼽았는데,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는 수령의 지방행정과 사법관리의 심판이라는 특정 분야에 국한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반해, 경세유표는 조선사회 전체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쓴 것으로 나라를 경영하는 모든 제도를 망라하고 있다.
왕실과 관리의 진료를 담당하던 내의원과 전의감, 그리고 서민의 질병을 치료하던 혜민서는
이조에 속한 20개의 기관들 중 일부인데, 경세유표의 내용으로 본즉, 그 빈궁한 처지가 지금의 공공의료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경세유표의 또 다른 구절을 보면, "삼의사에는 모두 조례(조선시대 관청에서 부리던 하인)가 없어서 체모가 말이 아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경세유표에서 묘사하고 있는 이들 기관의 처지를 요샛말로 정리해 보면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재정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고, 인력도 제대로 충원되지 않아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서민의 질병을 담당하는 혜민서의 처지는 더 궁색했던 것 같다.
혜민서에 속한 인력은 내의원이나 전의감에 속한 인력규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런 사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TV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혜민서는 의관이나 의녀가 궁내 권력투쟁에서 패하거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 쫓겨가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서민을 위한 의료기관으로 전염병 환자를 주로 다루는 활인서(活人署)가 있기는 했지만, 그 처지는 혜민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 선생은 조선시대판 '공공의료기관'이랄 수 있는 이들 삼의사가 형편없는 지경에 놓인 것을 통탄하면서, 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재정적, 인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정약용 선생이 경세유표를 쓴 지 벌써 200여년이 다 되어 가지만, 이들 의료기관에 대한 선생의 통탄은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공공의료 확충은 시민의 힘으로
최근 보건복지부는 업무보고를 통해 2008년까지 공공의료를 전체 의료의 30% 수준까지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이는 노무현 정부의 '공공의료 확충' 대선 공약을 재확인하는 것인 동시에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아무튼,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오리발을 내밀지 않고, 때마다 '공공의료 확충' 공약을 상기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다소간에 기꺼운 마음이 든다. 지금까지 역대 정권은 때마다 자신의 장미빛 공약을 상기시켜 주는 것조차도 등한시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꺼운 마음도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실망스러운 현실 일색이다.
그 중 단연 압권은 "성남 시민 1만8천여 명의 동의로 발의된 성남시립병원 설립 조례안 통과"를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성남시와 시의회의 몰염치한 행태이다.
시민의 힘으로 시립병원을 만들자는 성남시립병원 설립운동은 작년 7월과 9월 성남시 구시가지에 있던 성남병원과 인하병원이 잇따라 폐업을 하면서 촉발되었다. 응급의료조차 제대로 이용할 수 없게 된 의료공백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시민이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것이다. 의료공백으로 인한 주민 불안과 불편의 심각성을 반영하듯, 시립병원 설립 조례 제정 청구를 위한 주민 서명운동을 시작한 지 보름만에 1만8천여 명 이상이 시립병원 설립을 촉구하는 서명에 동참했다.
그러나 성남시와 시의회가 이 같은 시민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으며,
건강과 의료 문제를 '공공' 영역에 두길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현 시장과 시의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수구정당이 시립병원 설립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며, 차일피일 조례안 처리를 미룬 것이다. 급기야, 지난 3월 25일에는 시립병원 설립조례안 심의를 보류하면서,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공권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시립병원 설립'은 현 성남시장의 선거 공약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공약으로 내세운 '시립병원 설립'을 본인 스스로 공권력을 동원해 저지하는 자기분열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성남시립병원 설립은 매우 뜻깊고 의미있는 운동이다.
특히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시민이 수동적인 수혜의 대상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주체로 나섰다는 점에서, 의료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시민이 원하는 의료서비스, 시민이 필요로 하는 의료서비스는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진 병원을 통해 가장 잘 제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해 본다.
성남시립병원 설립은 경기도 성남시의 구시가지라는 특정 지역에서 벌어지는 운동이지만, 이 운동이 가지는 함의는 전국적이다. 성남시립병원 설립운동이 시민의 힘으로 시민의 병원을 만드는 전형을 제시함으로써 전국 각지에서 건강과 의료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능동적으로 분출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건강과 의료에 대한 시민의 자기결정권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장금이도 원한다. 성남시립병원 설립을!
만약에 장금이가 오늘을 살고 있다면, 성남시립병원 설립운동의 맨 앞에 서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돌림병이 돌던 마을에 홀로 남아 병자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정성이면, 능히 그러고도 남으리라. 삼의사의 형편없는 모습을 보며 내뱉은 정약용 선생의 통탄과 가난한 민초를 꺼려하지 않고 제 몸같이 돌보던 장금이의 정성은 결국 같은 희망과 염원에서 나온 것이 아닐는지?
이렇게 보면, 장금이는 다른 어떤 이가 아니다. 건강과 의료는 공공의 영역에서 모든 이에게 골고루 보장되어야 한다는 바램으로 성남시립병원 설립을 목청껏 외치고 있는 성남의 수많은 시민이야말로 바로 현대판 '대장금(大長今)'인 것이다. 이들 수많은 성남의 대장금에게 더 많은 박수와 연대를 보내자. 이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장벽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도록.
PS. 엄밀히 말해 조선시대판 '공공의료'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공공' 혹은 '공공영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18세기 유럽이 근대성을 획득해 가는 시기에 등장한 역사적 현상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장금이가 활약하던 조선시대에 '공공' 의료라는 말은 붙일 수 있는 개념적 근거는 없다. 이 글에서 쓴 조선시대판 '공공의료'는 그냥 문학적 꾸밈말로 받아들여 주시길 당부한다 . |